전역 직후의 시기 ~ 부여에서 만난 인연들 ~ 경기도민 되기
2022년 10월 7일, 이권형 정규 3집 [창작자의 방]이 발매 됩니다. 음반이 만들어진 과정을 돌아보며 작업기를 작성합니다. 다채로운 감상에 도움되길 바랍니다.
2021년 8월, 전역 직후, (음반 제목을 '창작자의 방'으로 바꾼 계기 중에 하나인) 오류동 원룸 전세집엔 제 지인이 머물고 있었고, 때문에 인천 남동구 소재의 싱어송라이터 '파제'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당시 그는 영종도에 '카페 륙' 개업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어느 때보다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며, 저 또한 이때까지는 확정한 바 없이 전역 후의 휴식 활동과 새 프로젝트 준비를 느슨하게 병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진행한 건 <커피토크> 싱글 작업이었습니다. 'C480(김태현)'이라는 뮤지션이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해주셨고, 마침 <커피토크>를 작업할 예정이었어요. 파제의 집엔 기타와 장비가 갖춰져 있었으므로 기타와 메인 보컬로 골자를 만들어놓고, 태현에게 건반과 바이올린 녹음을 하루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최대한 바보같이 (연주를 잘 하면 안된다는 게 포인트) 자유 연주를 부탁했고, 그렇게 나온 모티브 중 가장 직관적인 대목를 딱 잘라 반복 연주 부탁했습니다. 태현은 이후 군입대하여 복무 중입니다. 군역 아니었으면 활동을 같이 했을텐데 아쉬워요.
<커피토크>의 제목을 게임에서 가져왔습니다. 군대에서 맛있는 커피와 좋아하는 장소에서 가만히 보내는 시간을 그리워하며 쓴 곡입니다. <커피토크>를 가장 먼저 작업한 데에는 후에 [창작자의 방] 디자인 작업을 맡아주신 추지원 디자이너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휴가 때 잠깐 불러서 SNS에 올린 영상을 그가 보고 빨리 발매하라고 독촉했거든요. 그게 작업의 큰 동기가 됐습니다. 그때는 함께 작업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지만.
앨범웍의 컨셉을 '잘 하지 못함의 경지' 정도로 설정하고 이해미 작가가 잘그린 그림을 보정을 통해 일그러뜨리는 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창작자의 방] 아트웍을 드로잉해주신 이려진 작가님과의 인연으로 '못잘그린그림체'(초기 제작 과정에서 음반의 가제이기도 했음)라는 컨셉으로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이었던 셈입니다.
파제 파우스에서 술을 먹다가 단편선이 "자네 홍우주 가입하지 않겠나"라고 해서 술김에 약속을 하는 바람에 홍우주 조합원이 됐습니다. 홍우주는 '홍대 앞'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로컬리티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협동조합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한 정보가 없는 편은 아니었고, 홍우주에 가입하는 김에 부여에서 홍우주도 한 몫하는 '옥수수파티'라는 행사를 한다길래, 전역도 했겠다 그냥 놀러 갔습니다.
'옥수수파티'에선 요리도 하고 공연도 하고,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때의 분주함과 낯설지만 반갑고 편안했던 기분을 정확히 전달할 언어가 마땅치 않습니다만, '옥수수파티' 이후에도 그 인연이 귀하게 이어졌고, (드로잉 작업 해주신 이려진 작가님, 프로필 사진 찍어주신 김소라 작가님과 집을 스튜디오로 빌려주신 강정아 작가님, 부여에 공연 행사가 있던 날 관객으로 와준 인연으로 함께 작업까지 하게 된 추지원 디자이너를 비롯한) 이 사람들과 이 음반 전반의 협업을 제안하고 결과물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과의 불가사의한 시너지가 [창작자의 방] 곳곳에 묻어있다는 것 정도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음반의 기획 단계에서 가제를 '못잘그린그림체'였던 건 부여에서 만난 이려진 작가님의 영향입니다. 인스타그램(IG : @yriojin)을 보고 완전히 반했기 때문에, 그 다음번 만남 때 바로 같이 하자고 프로포즈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새 음반 작업의 방식과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아트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석촌호수> 이후의 아트웍 작업은 이려진 작가님과 진행했습니다. 이번 음반에 묻어 있는 색채들에 가장 직접적인 영감 준 건 그의 그림과 그와 제가 함께 공유하고 실천한 예술론(삶과 예술의 주객전도를 경계하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작업의 속도와 직관을 중시하는)이었어요.
속도를 중시하는 방식 덕에, 앉아서 수다 떨면서 신나게 그리면 아트가 완성되는 식의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그림은 어떤 경지에 있어요. 단편선이 적어주신 [창작자의 방] 소개글은 음반 소개글임에도 그 대목("자의 반 타의 반의 아마추어리즘을 넘어 매우 적극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의 미의식을 추구한다. 마치 장인처럼 아마추어리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경계는 종종 무화된다.")이야말로 그의 드로잉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그림은 '못잘그렸다'라고 농담조로 얘기하다가, 그것이 굳어져 초기엔 음악 제목을 '못잘그린그림체'로 상정하고 작업했습니다. 이후에 [창작자의 방]으로 변경된 이유가 있는데, 이려진 작가님이 업로드한 그림을 보고 완전 놀라서 이걸 메인 아트웍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이 '창작자의 방'이었고, 그 그림과 제목이 이 음반을 제작하는 저의 방식과 환경을 설명하기에 더할나위 없다고 생각하여 음반의 제목으로까지 차용한 것입니다. 서로 무의식의 단위로 미세한 시너지를 발휘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드는 건 저만 그런가요. 이려진 작가님은 컴퓨터로 작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시디 매체를 다루는 사람도 아닌데... 진짜 이상한 경험.
김소라 작가님은 천용성 프로필 사진 작업하셔서 걸로 전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부여의 행사를 통해 알게 되었고, 소라 작가님은 부여에서 '복순 투어'라는 사려깊은 작업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부여의 진복순 여사님이 과거에 찍었던 사진들을 연구하고, 사진 현장을 답사하고 투어 코스로 진행하는 행사예요. 그때 느낀 섬세함과 편안함이 소라작가님에게 프로필 사진 협업을 제안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 사람들과 작업하면 사진도 잘 나오겠다 싶었어요.
실제로 촬영 준비 단계부터 섬세하게 레퍼런스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다만 레퍼런스가 티모시 샬라메 컷이었으므로 지옥의 다이어트가 필요했으므로, 8월 말부터 촬영 당일인 9월 12일까지 급하게 다이어트를 시전했습니다.
극한의 다이어트 시전. 계란 2개, 양파 반개, 닭가슴살 100g... (따라하지 마세요. 안 좋습니다.)
촬영 장소를 부여 인연들(놀랍게도 대부분 서울 근교에 거주)의 모임 장소로 자주 활용되는 마포의 강정아 작가님 댁에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프로필 촬영 경험상 편안한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입각한 결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촬영했어요.
강정아 작가님은 합정에서 '안티 카페 손과 얼굴'이라는 공간을 운영하는 주체의 한 명이었고, 저도 안티카페를 종종 이용했던 관계로 부여에서 뵙기 전부터 그를 (사장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군역을 치르는동안 안티카페는 정리가 됐고, 그 즈음의 모습이 전유동의 싱글 <디플로도쿠스> 뮤직비디오에 기록되기도 했죠. 그러한 과정을 지켜봤던 한 명으로서 강정아 작가님과 이렇게 긴밀한 친분을 갖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의 놀라운 실천력이 위에 언급한 설명할 수 없는 흐름들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추진력으로 작용합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일 얘기를 하는데, 2022년 9월 12일 진행된 프로필 사진 촬영 날도 그랬습니다. 그날도 무슨 일 회의를 하시는데 소라작가님과 저는 한켠에서 촬영을 하고, 그러다 서로 구경하는 편안한 분위기였어요.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녹아 제가 편해 보이는 사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나온 메인 컷 1
그렇게 나온 메인 컷 2
그렇게 나온 메인 컷 3...
특히 이날 소라작가님과 촬영하면서 느낀 세밀한 소통은 어느 촬영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신묘함이 있었습니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 보다 그냥 사진에 찍힌 제 표정을 한번 보면 느껴지실 거예요. 놀라운 경험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창작자의 방] 마지막 트랙 <경기도민 되기>는 이번 음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곡입니다. 앨범 제작 막바지에 빠르게 쓰여졌고, 그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여러 층위의 경험과 감각들이 중첩된 트랙입니다. 곡의 완성도와 음악적 선호를 떠나, 그것이 <경기도민 되기>를 제가 가장 아끼는 트랙으로 꼽는 이유입니다.
첫번 째 층위 / 프로필 사진 촬영 당일은 부여에 처음 갔던 '옥수수 파티'로부터 정확히 1년 되는 날이었고, 그날 처음 만난 은성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1년동안 우리는 주로 부여에서 만나 신묘한 경험을 하고서는, 때가 되면 KTX를 타고, 광역 버스를 타고, 서울 근교에 도착하면 지하철로, 버스로 각자의 위치를 향해 흩어지곤 합니다. 그 속도와 방향의 감각. 그 층위가 첫번 째 레이어입니다.
두번 째 층위 / 저는 평일 주 5일을 야간에 노동하는 직업에 수년간 종사 중이고, 강남으로 출퇴근합니다. 출퇴근 시간 수원 방향 광역버스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상여 행렬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곡에 장송곡의 요소를 묻히고 싶었습니다.
세번 째 층위 / <경기도민 되기>를 쓸 무렵에 정말 아무 의미 없어도 꾸준히 만나는 책모임을 갖고 싶었습니다. 당시엔 저를 제외한 책모임의 구성원들이 모두 경기도민이었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과몰입한 상태였습니다. '경기도민 되기'라는 곡을 쓰고 책모임의 이름으로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별 의미 없이 그냥 어떻게든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이 모임은 오는 2022년 10월 8일에 네 번째를 맞습니다.
네번 째 층위 / 2022년 진행된 제 8회 인천평화창작가요제 공모가 이 곡을 완성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곡은 빠르게 쓰여졌고, 일정상 [창작자의 방] 버전의 편곡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평화창작가요제 공모에 선정되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버전의 편곡으로 완성되었으며, 이 버전 역시 평화창작가요제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됩니다.
다섯번 째 층위 / <경기도민 되기> 가사의 첫 문장은 제가 개인적인 일로 부침이 있을 때 부여에서 만난 김소라 작가님이 저에게 건내주신 말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그 말이 입에 붙어서 나올 정도면 그때 그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영화 대사 같아요.
“우린 오랜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까
또 우리 각자의 발길을 돌려도 나아가는 목적지는 같을 수 있을까요
생각해 간신히 가능한 일상들의 종착역
우린 왜 여기 모였고 또 흩어지는가
이 길의 끝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각자의 살아 온 흔적들도 그림처럼 그려지네
버스 시간 지하철의 방향은 우릴 갈라놓겠지만
각자의 길 가던 벡터의 감각으로 우리
우리 또 만나
이 길의 끝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각자의 살아 온 흔적들도 그림처럼 그려지네
각자의 길 가던 벡터의 감각으로 우리
우리 또 만나”
- [창작자의 방] Track 10. <경기도민 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