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권형 Dec 02. 2022

그 누구도 함부로 희생자의 이름을 대변할 순 없다

'연영석'의 <인터뷰>(2019년)

2022년 11월 24일 [인천In] '음악가 이권형의 인천인가요' 기고


 누군가를 대변한다는 것의 무게는 어떤 경우에든 가벼울 수 없습니다. 특정한 진실은 이름이 아니라 담론일 뿐이기 때문에 나는 남이 될 수 없고, 그렇기에 한 명의 주체로서 누군가의 이름을 온전히 대변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니까요.


 오늘 이야기할 ‘연영석’의 <인터뷰>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장애인 수용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살고자 시설을 뛰쳐나온 장애인” ‘동권씨’, “광화문에 나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참전용사” ‘민국씨’, 그리고 “음악을 하기 위해 알바를 하는 뮤지션” 라커씨.

 “그들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라는 게 곡 소개 문구의 설명입니다만, 이는 진짜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이 곡의 내용이 실제 인터뷰를 기반했다 한들, 또 그렇지 않다면 더더욱, 이는 결국 시와 운율을 거쳐 만들어진 픽션이니까요.


 왜 픽션이 필요했을까. 이름 없이 부재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 이름 붙여지고 호명될 필요가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 현실에서 한 명의 주체로서 온전히 누군가의 이름을 대변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대변하지 않는 존재들을 대변하여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자신들의 요구를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게 시와 운율의 구조였다는 것이죠.


 작가의 입장에서 <인터뷰>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면, 이 곡의 구조는 “기타치고 노래하는 딴따라” ‘연영석’이 그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3절의 ‘라커씨’를 비롯해, 이 사회에서 부재하는 이름들, (아마도 장애인 이‘동권’의 넌센스적 현현일) ‘동권씨’와 ‘민국씨’를 이해해보려는 한 실천으로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그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동일화하고 발언하는 과정에서, ‘인터뷰’라는 설정, 그리고 시의 운율과 구조를 빌어 허구적으로 발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거라는 겁니다.


 ‘부재하는 이름들’이란, 사회의 기능과 구조 도처의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고유의 공간을 찾지 못한 자들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명단의 포화상태로 여전히 수많은 ‘동권씨’, ‘민국씨’, 그리고 ‘라커씨’들의 말로 못 한 요구들은 결국, 이 사회의 비극적 사건으로서 불거지며 인식되곤 합니다.


 그리고, <인터뷰>가 수록된 '연영석'의 정규 4집 음반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는 여러 이름을 노래 속에 직접 호명하는 방식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더는 노래로 불러내야 할 이름이 없어지길 바라는 듯, 그 이름들을 픽션의 구조 안에 차례로 소환합니다. 중요한 건, 그 안에 환기되는 것이, 누군가의 특정한 정의나 담론이 아니라, 그동안 이름 붙지 않은 이 사회 구조의 진짜 ‘문제’들이라는 겁니다.


 지난 11월 13일, ‘시민언론 민들레’에서 “유족들이 그간 얼굴 없는 추모와 애도 속에서 미처 꺼내 놓지 못한 아픔과 고통을 민들레를 통해 토로할 수 있다면 민들레가 그런 역할을 하고자”한다며, 희생자 유족들의 동의 없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특정 지표를 통해 주제넘게 대변할 수 있다는, 또한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윤리적 책임과 존중의 과정은 무시할 수 있다는 무례하고 유감스러운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언론의 윤리와 책임을 따지기 이전에 더 나아가서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는 등, ‘국가’라는 이름 뒤에서 슬픔과 책임을 전가하고,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아노미적 국면을 초래한 책임이 어디 있는지조차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왜 이태원 참사 이후, 그 몇 주간 희생자들의 이름이 부재 상태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한 무책임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확실히 규명하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작금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과 요구에 대하여 필요한 건, 섣부른 대변(代辯)이나 해석의 개입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구조적인, 진짜 ‘문제’를 다루는 일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더 이상의 침묵도, 더 이상의 허구적 개입도 필요 없어지는 그 지점에 가서야, 그 수많은 ‘부재하는 이름들’의 요구는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대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영석'의 정규 4집 음반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 표지


“45세 동권씨는 장애가 있어

시설에 수용된 지 오래됐다지

매일 방바닥에 껌딱지가 되었다더군

츄리닝에 짧은 머린 패션의 완성

콩나물에 된장국은 너무 지겨워

기차타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다고 했지

음 스트레인지 월

69세 민국씨는 월남 참전 용사

군복에다 썬글라스는 패션의 기본

비가 오면 허벅지가 쑤시고 아프다 했지

요즘 젊은 것들은 애국심이 없어

목숨바쳐 싸웠는데 아무도 몰라

총에 맞은 상처는 무궁화를 닮았다 했지

음 스트레인지 월

35세 라커씨는 음악을 했어

기타치고 노래하는 딴따라딴딴따

무대위에 올라서면 하늘 높이 날고 싶댔지

청바지에 긴머리는 패션의 시작

언제까지 버틸런지 아무도 몰라

기타치고 노래하고 밥도 먹고 싶다고 했지

음 스트레인지 월

음 스트레인지 월드”

- ‘연영석’ <인터뷰>

작가의 이전글 <오후 세 시> 부서진 세계의 틈으로 꿈꾸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