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허공에 던져서 내 얼굴에 맞을 확률

만일✳✳

by twohfiveownn

그녀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가게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갇혔다. 빗소리마저 멎은 듯했고, LP판은 여전히 침묵했다. 가게에는 두 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말해도 될 만큼, 가게는 적막이 흘렀다. 나도, 그녀도 고개를 일정각도 이하로 내려 오래된 원목 테이블을 내려다봤는데, 뚫어질 듯 보는 정적과 시선들이 안 그래도 낡아빠진 테이블에게 흠을 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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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멀지 않았던 예전생각이 난다. 찰리를 껴안으며 봤던 영화에서 “돼지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독백하는 대사가 있었다. 스스로를 환멸 하며 공생의 어려움을 느낀 아이가 세상 가장 우아하고 처연한 말로 세상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대사였다.

맞은편의 여자는 이야기가 끝나고 왠지 가늘게 흐느끼는 것 같았다. 본인의 끔찍한 말로를 직접 맞닥뜨려야만 자신의 과오를 마주한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구조 자체가 너무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나의 고통은 외부의 폭력 때문이라 여겼지만, 과연 나는 순결한 피해자였을까. 내가 찰리를 잃고, 연인에게 버려지고, 회사에서 해고당했을 때, 나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지만, 그 분노 속에는 나약한 자기 연민과 비겁한 회피가 섞여 있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자신의 오만함과 쾌락으로 타인을 파멸시켰듯, 나 또한 나의 무기력과 절망으로 주변을 잠식하거나, 혹은 나 자신을 파괴하지는 않았던가. 그녀의 마지막 고백은 공간을 압도하는 침묵을 불러왔다. 그 정적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를 넘어, 존재의 심연을 파고드는 듯한 묵직한 무게를 지녔다. 나는 그녀의 서사가 남긴 심대한 충격과, 그로 인해 내면에 비친 추악한 그림자에 대한 냉혹한 자각 속에서 깊은 혼란에 잠겼다. 얼마 전 나의 고통이 과연 순수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거대한 파도처럼 의식을 강타했다.


고민해 보니 나 역시 xxx에 불과했다.

나는 연인과의 관계 파탄을 그녀의 변심과 이기심 탓으로 돌렸다. 그녀가 이별을 통보하며 차갑게 돌아섰을 때, 나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내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존재였는지를 스스로 되뇌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그러나 그 관계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잔혹하게 나를 비웃었다. 나는 그녀의 사랑 표현 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그저 나의 방식대로만 사랑을 주었다고 착각했다. '성인이라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명분 뒤에는, 사실 그녀의 감정적 요구에 대한 나의 지독한 무신경함과 귀찮음이 숨어 있었다. 그녀가 외로움과 불안감을 호소할 때, 나는 내 고통에 몰두하여 그녀의 손을 잡기는커녕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의 우울과 절망이 그녀의 삶을 짓눌렀고, 결국 그녀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녀가 떠난 것을 '버림받음'이라 해석했지만, 사실은 내가 그녀를 먼저 '지쳐 떠나게' 만든 것이었다. 이별 후 수반된 고통조차, 나는 '할 만큼 했다'는 자기 위안으로 깎아내리며, 결국 상대의 노력을 깎아내리고 탓으로 돌리는 비겁함을 택했다. 나는 연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본인 기준으로만 속단했던 것이다.


찰리의 죽음 또한, 나는 세상의 불합리함과 부조리 때문이라 믿었다. 찰리가 목구멍 안에 뼛조각과 싸우다 결국 침묵했을 때, 나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절규했다. '왜 하필 찰리인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 그러나 객관적인 진실은 나를 향한 날카로운 비수였다. 내가 그의 작은 이상 행동을 무시하고, '괜찮아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병원 방문을 미뤘던 시간들. 찰리가 뼈를 먹을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고, 나의 부주의함에 더 큰 책임을 느꼈어야 했다. 나는 그저 슬픔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스스로의 무책임함을 외면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이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본인의 만족을 위한 행위였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동물을 곁에 두면서, 사실은 내가 그에게서 무조건적인 케어를 받고 있었다는 섬뜩한 깨달음. 죽어가는 찰리를 어떻게든 품에 안고 맨발로라도 병원을 향해 달려갔어야 했다는 뒤늦은 자각이 심장을 찢는 듯했다.


회사에서의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부당한 권력의 희생양이라 확신했다. 나의 성과와 노력은 무시당하고, 단지 정치적 이유로 내가 밀려났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냉정한 현실은 나의 위선을 벗겨냈다. 나는 주어진 업무에 최소한의 노력만을 기울였고, 동료들과의 협력보다는 개인적인 고립을 택했다. 처음 '만일'을 알게 된 날 화장실에 금지된 흡연을 서슴없이 행했던 것처럼, 나는 회사 규율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책임감을 회피했고, 나의 무기력은 팀 전체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어차피 일은 일이고 나의 삶은 삶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역설적으로 삶을 살기 위해 기회비용을 벌러 회사로 출근하고 성과를 내는 것인데, 나는 등가적인 교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의 침묵과 소극적인 태도는 스스로를 '희생양'이라는 편안한 역할에 가둔 채,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시도조차 하지 않게 만들었다. 나의 신파는 오직 나만의 것이었을 뿐, 회사가 그것을 받아줄 권리는 없었다. 나는 그저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내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음에도, 세상의 탓으로 돌리며 도피했던 것이다.


그녀의 고백이 내 안의 심연을 강제로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내가 굳게 믿었던 나의 순결한 '피해자' 정체성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겪은 고통이 외부에서 온 순수한 비극이 아니라, 내 안의 어둠이 외부의 상황과 얽혀 만들어낸 파멸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나를 새로운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 지옥은 외부의 불길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냉기였다. 나는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죽을 수 없는 그녀처럼, 내가 만들어낸 심연 속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당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나요?"


적막을 깬 건 찰나의 의식 속에서 이전의 모든 것들을 마주한 내가 꺼낸 말이었다.

여자는 흠칫 놀라며 "'그'...라고? 내가 죽였던 그 사람을요..?"

표정이 일그러진 여자는 곧 나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죠? 제 얘기를 듣지 않은 건가요?"


나는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토해낸 고해의 무게에 짓눌려, 나의 질문이 자신을 비난하는 또 다른 형태의 공격이라 여긴 듯했다. 그러나 나의 질문은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내가 마주하게 된 나의 심연,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순에 대한 처절한 의문이었다. 어제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재능, 명성,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까지. 심지어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저주에 갇혔다고 했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당신의 고백 속에는, 그 모든 파멸 속에서도 **'가장 짜릿한 순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손목 힘줄이 끊어지는 것을 보며 느꼈던 광적인 쾌락, '예술 작품'을 완성했다는 만족감. 당신은 그를 죽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쾌락마저도 잃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고통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재능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재능으로 타인을 파괴하며 얻었던 그 도착적인 쾌락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쾌락의 근원에는, 당신이 파괴했던 '그'의 존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사랑이란 게 왜 항상 순결하고 깨끗한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 이란건 뱉던 삼키던 결국, '말' 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아요. 그냥 본인이 그것에 무게를 두거나 잊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로 치우치게 되죠. "


"그쪽의 행동을 두둔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정말 역겹고, 살인자가 맞아요. 스스로 죗값을 치르든 말든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재된 악의란 건 크고 작음을 떠나 인간이라면 한구석 자리 잡고 있죠. 그렇지만 적어도 이곳에 와서 본인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로 했다면 제 질문에 답을 못할 건 없겠죠. 저 역시 소실되고 잃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 덕분에 제대로 마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이제 본인에게 더 솔직해지세요. '내'가 아닙니다. '당신'한테요."

내 마지막 진심 어린 요구는 그녀의 남은 모든 방어막을 산산조각 냈다.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떨림은 걷잡을 수 없는 격렬한 흐느낌으로, 곧이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찢어져 나오는 듯한 울분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슬픔에 겨운 울음이 아니었다. 죄의 무게에 짓눌린 영혼이 마침내 터뜨리는 처절한 비명이었고, 스스로를 외면했던 시간들에 대한 격렬한 분노였으며,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처절한 절규였다.

그녀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였다. 흉측했던 손목의 붕대 아래로 혈관이 섬뜩하게 솟아났다. 숨 쉬기조차 힘든 격렬한 울음 속에서, 그녀는 마치 제어할 수 없는 물꼬가 터진 듯, 숨겨왔던 가장 추악한 진실을 토해냈다.


"사랑… 이요? 내가 사랑한 건… 그게 아니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끊어졌지만, 그 속에는 뒤틀린 절규가 담겨 있었다. "나는… 난… 파괴를 사랑했어! 나의 손끝에서 생명이 스러지고, 완벽한 순수가 비명으로 변하는 순간… 그 순간의 혼돈을 사랑했어! '그'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고, 기능을 잃은 손끝이 피로 물드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꼈어! 그것이 나의 예술이었고… 나의 존재의 이유였어! 그 사람은… 그저 수단이었을 뿐! 그 인간의 순수함… 그 순결한 영혼을 짓밟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절정이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았지.. 솔직히 말하지 못한 건 '그'는 정신나간채로 저주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했지만 날 향한 저주가 아니었어. 그건 본인한테 거는 저주였지."


그때, 여자의 동공 안에 시네마 필름처럼 그날의 풍경이 재생된다.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해상도는 점점 선명해져 갔고, 내 시야는 어느새 구분이 모호해진 그 공간을 자연스럽게 클로즈업해 줬다.

축축한 뒷골목, 퀴퀴한 냄새가 나는 쓰레기장 옆이었다. 빗물에 젖은 어둠 속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총 맞은 동물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피가 흘러나오는 손목을 필사적으로 다른 손으로 움켜쥔 채, 작게, 그러나 너무나 선명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으나, 그 속에는 그녀를 향한 무한한 슬픔과, 자신을 향한 깊은 자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미안해.. 왜 내가 조금 더 너를 봐주지 못했을까. 힘이 없는 내가 너무 원망스러워. 너를 그렇게 만든 환경이 너무 미워.. 네가 사랑하는 것에.. 나도 몸을 담그고 싶었어. 거기에는 나쁘고 좋은 게 없어.. 나는 네가 손을 잡아줄 때 그 온기를 느끼고 남은 평생을 살아갈 결심을 했었으니까. 지금 끊어진 내 쓸모없는 손이 아쉬운 건 연주를 못해서가 아니야.. 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그게 너무 속상해.. 미안해.. 아니다. 그냥 아무 일 없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것을 나한테 취해가면 난 그걸로 괜찮을 거야. 정말로."


'그'의 독백

퀴퀴한 골목 어둠사이로 '그'는 묘한 슬픔이 담긴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도 방해 못할 결정이 담긴 눈은 조금 시간이 지나더니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피날레를 마친 연극처럼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흐렸던 눈이 또렷해지고 내 시야에는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가 보였다.


"나는.. 나는...!!"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씰룩거렸지만, 억눌렸던 진짜 감정들은 끝내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 엉겨 붙어 있는 듯했다. 단순히 질투와 시기가 삐뚤어진 방식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라는,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오히려 더 견딜 수 없는 진실. 남자가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그녀를 품으려 했다는, 믿을 수 없는 따뜻함. 그 솔직한 마음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맴돌았다.

착각일 수 있지만, 그녀는 체형이 조금 작아진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녀는 진정이 됐는지 달달 떨리던 어깨는 미세하게 진동이 멎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비어있는 듯했지만, 이제는 거기에 묵직하게 엉겨 붙어있던 모든 그림자가 걷히는 듯했다. 고통도, 후회도, 심지어 파괴의 쾌락마저도,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듯 천천히 투명해져 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텅 빈 평온이었다. 그녀의 손에 흉측하게, 제멋대로 여기저기 곪아있던 피부는 흉터만 남아 돌아왔으며, 이제는 새겨져 있던 삶의 굴곡진 흔적들만 희미하게 남은듯했다. 그녀의 숨소리는 옅어지다 이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죽음의 기척보다는 고요한 안식에 가까웠다. 그녀의 모습은 점점 더 연약해지는 듯했고, 마침내 그녀를 감싸던 모든 기억과 감정이 아련한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비워진 채, 테이블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텅 비어 보이는 눈동자, 그러나 이제는 어떤 고통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은 얼굴. 하나, 무엇을 굳게 결심한 얼굴. 그녀는 나를 향해 아주 짧고 간단한 목례를 했다. "고맙습니다." 그녀와 같이 들어왔던 차가운 유리조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알게 모르게 테이블에 놓인 돈이 들은 것 같은 봉투만 책상에 놓여 있었다. 마치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건네는 마지막 인사 같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미동도 없이, 스르르 카페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 바닥에 닿는 기척조차 없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 그녀는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싱겁게 사라졌다. 그녀의 존재가 원래부터 없었던 듯, 허공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가 앉아 있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움직여 테이블을 닦고, 찻잔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채비를 했다. 낡은 원목 테이블 위에는 방금 전까지 한 사람의 처절한 고백의 이야기가 오갔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카페는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겼고, 고즈넉한 등불만이 희미하게 내부를 비추었다.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서가, 먼지 앉은 LP 플레이어, 창밖으로 골목 틈, 작게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생각엔 아마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 재능도, 명예도, 가족도, 그리고 그녀를 파괴로 이끌었던 질투와 시기, 그 끔찍한 사랑의 기억마저도. 마치 텅 빈 인형처럼,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비워진' 것이다. 그녀의 남은 속죄는 이렇게 치러지는 것이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진 자에게, '만일'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선물을 주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죄를 '속죄'시키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이 도시 어딘가에, 혹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과거의 그림자 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아니면 비워진 채 영원히 헤매고 있을지는 알 수없다. 나는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다음 손님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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