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당신은 여전히... 을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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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한 젊은 여성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고,
검은색 외투는 빗방울을 머금고 축축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피뭍은 붕대를 감은 손, 그렇게 곱게 모은 두 손에는 마치 산산이 깨진 유리 조각이라도 든 듯이,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했다. 그 시선은 방황하는 듯했으나,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딘가에 정착하려는 듯한 미묘한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옅게 고개를 숙였다.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피로와 슬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내 어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내 입에서 나온 첫 접객의 말이었다. 내 내적 방황과는 달리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측불허의 주문을 건넸다. "펄펄 끓는 물을 주세요." 그녀의 주문을 듣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입안에서 맴돌던 "어떤 차를 드릴까요?" 혹은 "커피는 어떤 종류로 준비해 드릴까요?" 같은 상투적인 접객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끓는 물이라니. 그것도 가장 뜨겁고, 아무 맛도 나지 않고, 모든 것을 희석시킬 수 있을 만큼이라는 모호하고도 절박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물음이었다.
내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음을 그녀는 알아차렸을까. 찰나의 순간, 나는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고, 컵을 든 손이 살짝 굳었다. 이곳에 오기 전, 노인이 건넸던 "손님이 부탁하는 차나 커피를 내오고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것. 그것이 당신의 기본적인 업무입니다."라는 간결하고도 명확했던 지시가 머릿속을 스쳤다. '펄펄 끓는 물'은 분명 그 지시의 범주에 들지 않는 예외적인 요청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차나 커피'도 결국 '물'을 기반으로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묘한 합리화가 내 안에서 피어났다.
복잡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주문은 간단했으므로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림 없는 듯 보였으나, 내 발걸음은 평소보다 약간 더 무거웠다. 주방으로 향하는 짧은 동선 속에서,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다. 마치 내가 이 공간의 규칙을 얼마나 유연하게 받아들이는지 시험하는 듯한,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싱크대 앞에 서서 차가운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 아까 틀지 못한 LP판을 아무거나 대강 잡아서 판에 올려 재생해두었다. 그녀와 나 사이 적당한 여백이 음악으로 매워졌다. 내가 골라잡은 판은 빌 에반스(Bill Evans)의 'Peace Piece'. 찰랑이는 물소리가 음악과 함께 가게 안에 울렸다.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물을 받아 인덕션 위에 올려두자, 잠시 후 '치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주전자의 바닥에서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끓는 물이 이 여인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단순히 목마름을 해소하는 물이 아니라, 그녀의 과잉된 감정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무언가'일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주전자의 추가 흔들리며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나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겹쳐지는 듯했다.
내가 위 과정을 준비하며, 솔직하게 속으로 감가 없이 뱉을 수 있는 말은 "저 여자 미친 거 아냐?"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제의 나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텐데, 파렴치한 생각이다.
어쨌든 물은 금방 끓여졌고, 곧이어 그녀의 앞에 놓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끓는 물을 받아 든 그녀는 컵 속에서 피어오르는 허망한 김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초점 없이 멀리, 혹은 아주 깊숙한 곳을 헤매는 듯했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핏기 없이 창백했고, 컵을 쥔 채 미동도 없었다. 그 고요는 모든 감각을 희석시키려는 열망처럼 느껴졌다. 그 끓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손끝에서 망설임도 보였다. 나는 여전히 속으로 "어째, 끓는 물 하나 앞에 두고 비 오는 날 다 스러져 가는 엔틱 한 카페 안에서 남녀 둘이 맞대는 상황. 이 모습을 3인칭으로 누군가 본다면, 참 볼 만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내가 망상을 펼치는 동안, 그녀는 결심을 마친 상태였나 보다. 수증기가 모락 피어 나오는 뜨거운 물을 연약해 보이는 목구멍으로 가차 없이 집어넣었다.
"벌컥..! 벌컥!"그것도 끊김 없이 한 번에. 나는 그 기개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더 특이점은 가게 안을 조용히 채우던 빌 에반스의 'Peace Piece'가 갑자기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평화롭고 고요했던 피아노 선율이 마치 낡은 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음정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건반 소리가 삐걱거렸다. 무언가 잘못된 을 직감했다.
"괜찮으세요..?" 나 역시 기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의 미간은 약간 일그러졌으나,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신음도 없었다. 여자는 목석인형처럼 미동 없이 앉아있었는데, 딱 하나. 그녀의 가장 생동감 넘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조용하게 페달을 밟아 잔향만 남은 음처럼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흐린 날, 곧 그칠 것 같은 빗방울 하나 둘이, 거슬릴 정도로 안 끝나고 지속적으로 내 정수리를 적시는 것처럼 그 눈물은 끊기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외곽으로 물러나 끊겼던 턴테이블과 LP를 정비했다. 대략 5분 정도 걸린 것 같다.
그 여자 옆을 스치며 '바'로 향하고 있었는데, 여자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조금 후련 해졌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지쳐 있었지만, 뜨거운 물을 마시기 전보다는 한결 가볍고 투명하게 울렸다.
그녀의 눈은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마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아 보였다.
"제 몰골은 이렇지만, 저는... 한때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자신의 과거를 무덤덤하게 꺼내놓으려는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재능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밥벌이는 할 정도였으니까요. 집도 잘 사는 편이었고.. 부모님도 아낌없이 지원을 해줬습니다." 나는 어느샌가 맞은편 자리에서 착석해 있었다.
"저는 관심이 좋았어요. 더 많은 갈채와 사랑을 받기 위해 디데이를 정해두고, 종일 연습실에 틀어박혀 하루 온종일 피아노만 쳤죠.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재능은 안 필래야 안 필 수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 제 음색은 독보적이었고, 제 테크닉은 완벽에 가까웠다고 자부했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제 손끝에서 시작되고, 제 손끝에서 완성된다고. 관객들의 환호성, 평론가들의 극찬... 그 모든 것이 저를 둘러싼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졌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컵을 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하지만... 제게는 재능만큼이나 지독한 추악함이 있었습니다. 절 가르치던 선생님의 충고는 잔소리로 들렸고, 동료들의 노력은 한심해 보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신경 쓰이는 게 생겼어요. 그건 저와 비슷한 또래에 피아니스트 친구였어요. 그는 당시에 저와 정반대였죠. 저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진정성이 있었고, 무엇보다 순수함이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창백한 얼굴에, 처음 보는 섬뜩한 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빛 같았다.
"처음엔 그저 거슬렸어요. 저런 하찮은 것이 감히 내 앞길을 막으려 드나 싶었죠. 어릴 때 잘 몰라서 길가의 꽃을 뜯어버리고 개미를 짓밟는 순수한 '악의'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조금 달라졌죠. "굳이 내가 손을 댈 필요가 있나? 직접 부수게 하면 되지!" 마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서서히 멀리서부터 더럽히고 싶은 충동처럼요.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오갈 때마다, 저는 그의 영혼이 얼마나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지를 알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여림을 어떻게든 부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는 말을 멈췄지만, 내 귓가에는 다시 LP판에서 들려오는 듯한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맴돌았다.
"그 남자는 본인의 연주처럼 아무런 저의가 없었고, 성격도 순수했어요. 그냥 보이는 것들에 대해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만든 평화를 지키려 애썼죠. 어느 날 축하 해주면서 그 남자에게 접근했습니다. 저는 사랑을 많이 받아봐서 기본적으로 삐뚤어진 성격임에도, 표면상 연기를 잘했어요."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저는 그에게 '진정한 음악적 영감'을 찾았다며, 밤늦도록 함께 연습실에 남아 연주하고,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척했습니다. 그의 순수한 눈빛은 저를 향한 동경과 존경으로 가득 차 있었죠. 그 순진한 믿음이 그 남자를 더더욱 더럽히고 싶게 만들었어요. 그의 손이 건반 위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때마다, 저는 그의 손을 탐하듯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인남녀가 그렇듯 자연스럽게 저는 그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녀는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지며, 그 안에 숨겨진 역겨운 만족감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순수한 만큼 본능의 충실했어요. 불친절한, 여자몸에 대해 잘 모르는 듯이 강하고 거칠게 하면서 동시에 어딘가 서툴고 순진한 그의 움직임은 저의 비틀린 욕망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뜨거운 숨결이 제 귓가에 닿을 때마다, 저는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가 온몸으로 제 속을 헤집어 갈구하며 쾌락의 끝에 다다랐을 때, 저는 그의 등 뒤에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상대가 망가지고 파괴되면서 생성되는 정복감, 그것이 저에게 가장 강렬하고 직접적인 쾌락이었죠. 관계가 끝나고 저는 그의 땀에 젖은 몸을 내려다보며 역겨움과 희열이 뒤섞인 감정에 몸서리쳤습니다. 마치 깨끗한 도화지에 검은 물감을 뿌려 완성한, 저만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했어요."
"새벽녘, 그가 잠든 사이 몰래 빠져나와 뒤돌아보지도 않았어요. 제가 보고 싶은 건 그가 정서, 육체적으로 병신이 되어 좌절하고 아파하는 거였으니까요. 그건 저의 가장 은밀하고 섬뜩한 목표였습니다."
"그 후에 저는 그를 성욕 해소용으로 필요할 때만 쓰고 버리는 장난감처럼 대했어요. 어쩌면 장난감이 나을 수도 있겠네요. 성적으로 흥분시킨다는 목적으로 그에게 수치심을 주며 자위하는 게 제 일상이었습니다. 그가 제게 연인이라는 이름아래 감정적으로 매달릴수록, 저는 그를 더욱 차갑게 하대하며 짓밟았습니다. 제가 그를 내버릴 때마다 그는 매번 서럽게 울었지만, 그럼에도 절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마 그에겐 제가 그를 혐오한다는 선택지는 없었을 테니까요."
'단순히 잘 몰라서, 표현방법을 몰라서 그런 걸 거야.. 내가 받아 주고 이해해 주면 언젠가는 나아질 거야.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그는 이렇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엽게도, 서로가 서로의 본위를 모른 채, 한편으로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심연이었죠. 그는 제 예상보다 빠르게 병들어갔습니다. 저는 저대로, 그는 그대로 연민을 느끼면서 말이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요, 그의 고통이 깊어질수록, 제 안의 오만함과 지배욕은 더욱 만족감을 느꼈죠. 결국 그는 저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바랐는지, 어떤 사람인지 조차 잊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총명한 눈빛으로 순수하게 연주하던 그의 음악은 끝났습니다. 그의 손가락은 더 이상 생명력 있는 멜로디를 만들지 못했고, 그의 눈은 어느새 제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비겁한 눈빛으로 변했어요. 그의 영혼은 제가 파놓은 구덩이 속에서 서서히 썩어갔죠.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제가 그를 완전히 부수고 더럽혔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연이어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저와 몸을 섞었다는 소문을 저는 조용히 주변에 하나씩 흘렸습니다. 그 구전은 돌고 돌아 어느새 저희 부모님 귀에 들어갔어요. 몹시 분노한 부모님은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산과 노력으로 이미 내쳐진 그 남자를 더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어요.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거행된 것은 돈으로 매수된 부랑자들이 그 남자의 손목 힘줄을 끊어서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삶의 가장 짜릿한 순간 중 하나였어요.'
멀찍이 몰래 구경하던 저는 흥분하기 시작했어요. 이전에 비할 수 없는 온몸이 젖는 듯한 오르가슴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병적인 집착과 끔찍한 만족감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속에서 느껴지는 점액질 같은 불쾌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의 고통이 외부의 폭력 때문이라 여겼던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주는 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저렇게 까지 끔찍한 악의가,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 감도 안 잡힐 그녀의 사연이,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애써 외면했던, 인간 내면에 잠재된 추악한 그림자를 발견하는 듯한 섬뜩함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죽었습니다. 아무런 진실도 모른 채, 온전치 못한 정신의 그는 제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저주를 퍼붓는 말을 반복하며 길거리에서 죽어갔어요."
격양됐던 그녀가 차츰 수그러들며 이야기의 끝을 내려는 말을 이어갔다.
"끔찍하고 역겹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는 저의 추락에 관해 이야기를 할 테니까요."
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그녀의 손목에 감긴 낡은 붕대를 보았다. 그녀는 붕대감은 손을 위로 보이면서 천천히 풀어갔다. 풀린 붕대에서 튀어나온 곪아 터져 버린 피부는 울퉁불퉁하고 흉측했다.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였을 겁니다. 제가 그를 파괴하고 느꼈던 그 광적인 쾌락은, 이유 모를 통증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의 기포가 수천 마리의 벌레처럼 제 전신을 감고 찌르기 시작했어요. 고통을 피해 간 제 신체부위에서 조그마한 틈마저도 알 수 없는 공포로 가득 차기 시작했죠. 너무 고통스러워서 매일밤을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포기할 즈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났어요. 정답처럼 떠올려진 그 직감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잠시 호흡을 멈춘 여성이 3초 정도의 공백을 가지고 입을 뗐다.
"정답은 바로 제 손을 불태우는 거였어요. 이윽고 받아들이니 왠지 쓸쓸하면서 마음의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저는 제 방 커튼에 불을 질렀고 손을 들이밀어 역겹게 살타는 냄새를 맡으며 노릇하게 구워지길 기다렸어요. "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근의 다른 사람이 불빛을 보고 구출했고, 형태만 남아있고 대부분의 기능이 상실된 두 손과, 제 안도의 미소가 남았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스쳤다. 마치 그 끔찍한 경험 자체가 그녀에게 또 다른 형태의 뒤틀린 만족감을 주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정말 지옥이 시작된 것은요. 손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제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이전처럼 저를 감싸주지 않았어요. 저의 손이 피아니스트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자, 그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버렸죠. 제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의 가장 큰 가치인 '재능'이 사라지자 그들은 저를 버렸습니다. 제가 누리던 모든 특권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고급 병실에서 싸늘한 병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고, 날 돕던 모든 인간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대신, 이전의 광기 어린 고통은 멎었지만, 그건 곧 다른 고통의 서막에 이르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녀는 창백한 손으로 비어있는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쓸모 없어진 저는 매일매일이 달라졌어요. 손의 기능을 상실했던 저는 상처가 조금 아물고 나서 그간 제 개인적으로 모아둔 돈으로 임시거처를 구하고, 항생제와 고통을 멎기 위한 진통제를 주기적으로 투여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돈이 생기는 건 아니기에, 저는 가장 등한시했던 것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팔아서 몸을 챙긴다. 아이러니하죠. 저에겐 치욕스러운 생존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좋은 음식 옷만 입던 콧대 높은 저는 환경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노와 괴로움의 연속이었죠. 어딘가 '그'가 나타나 조소를 띄우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계속해서 짖다가, 차츰 목이 쉬면서 울기 시작했고, 어느덧 후회와 인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제가 얼마나 역겹고 잔인한 짓을 해왔는지. 그 뒤로 계속 몸을 팔면서 중간중간 폭력을 당했고 후유증으로 신체의 대부분이 무감해졌습니다. 정신은 더 바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 꺼지는데, 두 가지 나의 구성 요소가 역순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게 어느덧 4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저지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어요. 살아있는 지옥, 그게 바로 지금의 저입니다. 그리고 더 끔찍한 인과응보는, 제가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죽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갈라져 나왔다.
"그가 죽었던 그 장소에서 매일 밤 서 있습니다. 수없이 뛰어들려 했죠.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죽음을 거부해요. 수면제를 아무리 삼켜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칼날을 대면 살이 찢어지기만 할 뿐 심장에 닿지 않아요. 차에 뛰어들려 하면 몸이 저절로 굴러 떨어져 둔탁한 소리만 날뿐 상처 하나 입지 않죠.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제 목을 죄어오듯, 제 영혼을 이 세상에 묶어두는 것만 같아요."
그녀는 자신의 손목, 그리고 발목을 번갈아 가리켰다. 마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이 모든 고통이… 제가 그에게 준 고통의 배로 저에게 돌아오고 있어요. 그의 손목 힘줄을 끊었던 그 조소와 웃음들이, 이제는 제 신경 하나하나를 좀먹는 환상통으로 바뀌어 저를 미치게 합니다. 제가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던 것처럼, 제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있습니다. 제가 그에게서 앗아갔던 꿈과 희망만큼, 제 삶은 형벌처럼 끝나지 않는 절망 속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어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저는 그 죄책감 속에서 반쯤 영원히, 더 약해져 가면서, 이 고통을 견뎌야만 합니다. 이것이… 제가 그에게서 앗아간 삶의 대가입니다. 그가 죽지 못해 고통받는 나를 매일 밤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저의 '예술 작품'인 그가, 이제는 저의 가장 잔혹한 *'영원한 관객'*이 된 거죠. 이 모든 고통이, 저에게 배로, 아니, 배가 아닌 저주로 갚아지고 있는 겁니다."
그녀의 고백은 나의 심장을 직접 후벼 파는 듯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찰리를 잃고, 회사를 떠나고, 연인에게 버려졌을 때, 나는 세상을 향해 분노하며 내가 얼마나 순수한 피해자인지 외쳤다. 그러나 과연 나 자신은 그토록 순결했을까? 나의 불행 속에도, 어쩌면 나도 모르는 이중성과 추악한 욕망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쏟아냈던 절규가 정말로 순수한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나약한 자기 연민과 도피에 불과했을까.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나는 점점 더 메스꺼워지는 내 안의 이질적인 감각과 씨름해야 했다. '고통을 주는 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그 거울에 비친 내가 감추고 싶었던 추악한 단면이 섬뜩하게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추락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낸 지옥이었고, 그 지옥의 불길은 나에게까지 옮겨 붙는 듯했다. 나는 그저 그녀의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 나의 불행이 세상의 부당함 때문이라 굳게 믿었던 내게, 그녀의 이야기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내면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내가 쏟아냈던 분노와 절규 속에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내가 짊어진 '그것'의 그림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이 희미하게 고개를 들었다.
공간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찢어지는 굉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희미한 한숨과 나의 거친 숨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울렸다. 나는 그녀의 고백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은 단순한 '고통을 삼키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나의 안이한 시선을 뒤흔들고, 인간 본연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추악함을 직면하게 하는 곳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다음에 꺼낼 이야기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낼 준비를 할 뿐이었다. 이 지옥 같은 고백의 끝에,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