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낡은 나무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딸랑" 작고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모든 소음과 쌀쌀한 냉기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마치 두꺼운 막이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듯, 고요함이 밀려왔다.
가게 내부는 외부에서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저런 말도 안 되는 건 어디서 구한 걸까?" 싶은 빈티지 스피커 2대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장식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말고 없었지만,
가구들이 엔틱 하면서 대체로 정교했으며, 각각 제법 손을 탄 흔적이 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짙은색의 원목 가구들이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의 황동 액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는데,
그림 대신 미세한 선으로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책장에는 빛바랜 양장본 서적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수집했을지 모를 희귀한 LP판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앨범 커버의 닳은 모서리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조용히 시간을 견디는 듯했다.
코끝을 스치는 향은 아까 골목에서 맡았던 흙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은은한 차 향이 뒤섞인 듯했다. 공간 전체에서 편안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 스툴에 앉아서 주변에 취해 기다리고 있었다.
2,3분 정도 소요됐을까, 불쑥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가게 안쪽 깊숙한 곳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이었지만 그 사람은 묘하게 젊어 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백발의 단정한 머리카락은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럽게 정수리를 덮고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하고 차분한 눈빛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짙은 남색의 오래된 벨벳 소재 재킷을 입고 있었다. 재킷 안에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려진 하얀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소매 끝에서 세월의 흔적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불필요한 장식은 전혀 없었지만, 그 모든 요소들이 어딘가 비범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길고 섬세한 그의 손가락에는 오래된 은반지 하나가 묵직하게 끼워져 있었고, 그의 움직임은 마치 물 흐르듯이 유려하고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탁자 건너편에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적막한 풍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그는 나를 빤히 응시했지만, 그 시선에는 어떤 판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깊은 침묵만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미안합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감상은 차치하더라도, 가게가 오픈시간이 아닐 수도 있음을 염두해둬야 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든 보이면 사과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쭙잖은 배려심을 가진 좀도둑 놈이 따로 없었다.
노인은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주 느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엇이 미안합니까?"
"아... 그게... 제가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 게다가 영업시간도 아닌 것 같고..."
그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이곳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다만, 그 문이 모든 이에게 보이는 것은 아닐 뿐."
그의 시선은 내 눈을 꿰뚫는 듯했다.
"당신에게는 보였고, 그래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괘념치 마세요."
그의 말은 큰 내용은 없었지만 내가 겪어온 모든 불행과 지금의 절박함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숨통이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입을 먼저 뗀 것은 점장 같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당신. 양손에 한가득 들고 있는 것이 마치, 자녀가 부모와 같이 장을 보러 가서 같이 들어주는 장바구니와 같네요. 사실, 면밀히 보자면 손이 아니라 등짐처럼 짊어진 거겠지만. 당신이 골라 잡아온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겠습니까?" 그는 찻잔을 천천히 내밀며 말했다.
"저는 모든 걸 잃었습니다.." 갑자기 누가 입을 잡아당기듯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연인도, 가족도, 재산도 모든 게 다!! 내가 살아오며 쌓아온 사반세기의 모든 것이 단 이틀 만에 모든 게 망가졌어요. 수복할 수도 없고요. 이건 너무 억지 아닌가요?"
수도세 걱정 없이 남이 틀어놓은 물이 쌓인 봇물이 터지듯 연이어 뱉은 말이었다. 말을 뱉어낼수록 억눌렸던 감정이 점점 미칠 것같이 끓어올랐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부아가 치밀었고, 눈물이 북받쳐 올라 내 시야를 가렸다. 어느새 엉망이 된 얼굴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터져 나오는 울분을 막을 수 없었다. 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흐느낌과 뒤섞여 더 이상 그건 언어가 아니었다. 우발적으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내게 왜 이런 일이... 대체 왜...!!!"
비명에 가까운 한심한 절규가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
.
.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나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모든 슬픔과 분노, 절망을 토해내듯이 울었다.
내 감정에 아랑곳 않으며 노인은 여전히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동요도 없이, 그의 시선은 내 격한 감정의 표면을 뚫고 그 밑바닥까지 꿰뚫는 듯했다.
"그렇군요. 당신은 '스스로' 느낄 때 가장 무거운 것들을 가져왔군요. 대강 듣자 하니 사랑하는 이의 부재, 소중한 생명의 상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런데 혹시 아십니까?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알 수 없는 공명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모든 것'이라... 자신은 여전히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존재는. 당신의 선택은. 그리고 잃었다는 그 '모든 것'이 진정으로 당신의 본질을 결정했는지, 혹은 당신이 짊어진 것이었는지."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행여 나의 분노가 모순이고 이질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쉽게 지껄입니까?" 정곡이 찔린 인간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내 언사가 과했나 싶었던 나는, 조금 움츠리며 서리 낀 안구로 쳐다봤고,
노인 같은 점장은 미동도 없이 입만 열어서 대꾸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그리 쉽게 지껄이냐고요? 좋습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짊어진 '그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분노하게 하는지, 스스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씩씩거리던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일다경(一茶頃)쯤 지났을 때, 먼저 입을 뗀 건 노인이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이 짐에서 벗어나 무(無)로 돌아갈 용기입니까, 아니면 이 절망 속에서 당신만의 의미를 찾아낼 지혜입니까? 이곳, 만일(滿一)은 그 답을 찾아주는 곳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그 답을 선택할 수 있도록."
"무엇을 원하냐고요?"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그저 이 고통이 끝나길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 저에게 의미를 찾아낼 '정답' 같은 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알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아까 일각 정도 토해내더니 잠이 오는 것 같았다. 빨리 이 상황의 마무리를 짓고 싶어졌다.
"가능하냐고요?" 노인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이전보다 아주 미세하게 따뜻한 빛이 스치는 듯했다.
"저는 '만일'이 도시전설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방문한 손님의 모든 부정을 해소시켜 주고 처리해 주며 홀가분하게 나가게 해 준다'라고들 하더군요. 제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참 흥미롭습니다만..." 노인은 말을 잇다 말고 묘하게 부정하는 듯 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지만, 곧 다시 선명하게 나를 향했다.
"이곳, 만일은 단순히 짐을 내려놓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소문처럼 봉사 정신이 투철하지도 않고요. 이 가게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점장에 불과하니까요."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게 안쪽의 다른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줄 수 있습니다. 이곳은 그저 커피 한 잔의 값으로 모든 것을 쏟아내고 본인이 만족하면, 그것은 구전처럼 단순한 해소의 장이 되겠지요. 그런데 과연 정말 완전히 빈손으로 나갈 수 있던 걸까요? 애초에 그 짐은 제대로 풀었던 게 맞을까요? 아뇨,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당신에게만큼은 이'장소'는 단발성으로 끝내는 곳이 아닙니다. 조금 더 머물면서, 스스로 답을 탐구해보는 게 어떨까요? 만약 당신이 그 '답'을 간절히 원한다면, 아마 이곳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만약 괜찮다면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접객을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은 왠지 내게 마지막 동아줄처럼 들렸다.
'정답'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모호했지만,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지가 있을 거라는 기대 자체가 지독한 갈증 속 한 모금의 물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불안과 절망을 끝낼 수 있는 **'마무리'**라는 단어가 가장 크게 와닿았다. 더 이상 생각할 기력도, 따져 물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접객... 원이요?" 나는 그의 말을 되뇌었다.
목소리가 쉬어 갈라졌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건데요?"
반문했지만,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승낙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지금 당도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딘가에 몸을 기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절실한 위로였다. 노인의 제안이 나를 다시 끌어올릴 닻이 될지, 아니면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그의 손을 잡고 싶을 뿐이었다.
"좋습니다... 해보겠습니다."
내 대답은 힘없이 툭 떨어졌지만, 그 순간 텅 비었던 마음속에 아주 미약한 **'기대'**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곳에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였다.
내 대답을 들은 노인은 고요히 나를 응시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이 일에 대해서 더 듣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노인은 말을 이었다.
"사실, 거창한 것은 없습니다. 손님이 오면 차나 커피를 내오고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것. 그것이 당신의 기본적인 업무입니다. 나머지는 그저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요. 거기서 당신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위로를 건네도 좋고, 칭찬을 하거나, 심지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단 폭력은 안 됩니다. 당신의 의무는 그게 다입니다."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유려했고, 마치 내가 착각이라도 한 듯 그는 어느새 카운터 너머 작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문을 열자,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좁고 긴 복도가 드러났다. 노인은 고갯짓으로 나를 안내하듯 문 안쪽을 가리켰다.
"이곳이 당신이 머물 곳입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을 겁니다."
나는 질문하고 싶은 것 투성이었지만, 아쉽게도 입을 뗄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왜 숙소가 있지? 나 외에 어떤 사람이 묵었던 걸까? 나보다 이전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머릿속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몸은 그저 노인의 뒤를 따랐다.
멍한 상태로 그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조차 흡수하는 듯한 바닥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노인은 열쇠가 꽂힌 나무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은 아담했지만 아늑했다.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창문 없는 공간이었지만, 벽을 따라 은은하게 퍼지는 간접조명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의 중앙에는 견고한 원목 프레임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낡았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시트가 단정하게 덮여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오래된 스탠드와 함께 빛바랜 표지의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누군가의 흔적이 엿보이는 듯했다. 맞은편 벽에는 손때 묻은 짙은 갈색의 3단 서랍장이 자리했고, 그 위에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마른 꽃들이 놓여 희미한 꽃향기를 더했다. 방 전체를 감싸는 오래된 나무 향과 뒤섞인 낯선 꽃향기는 이곳이 과거에도 누군가의 안식처였음을 짐작게 했다. 그는 열쇠를 내 손에 쥐여주고는 말없이 뒤돌아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의 모든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긴 하루. 아니, 정확히는 이틀간의 지독한 악몽이었다. 몸이 조금 편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상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나열해 봤다.
오랜 연인과의 이별, 찰리, 회사, 현재와 앞으로의 나.
그중, 여자친구와의 이별은 차라리 낫다. 예견된 수순이니까, 하지만 찰리가 떠난 후, 연이어 몰아치던 재난은 내 이성의 인내심 끝에 가서 허망하게 끊어놓았다.
이 방의 고요함은 바깥세상의 광기 어린 혼란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이곳은 분명 낯설고 신비했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식을 주었다. 마치 폭풍우 속 작은 섬에 표류한 기분이었다. '만수래일빈거'. "두 손 가득히 왔다가 한 푼(하나)도 없이 간다"
가게의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접객원'이라는 새로운 역할. 나는 내일 아침, 아니 오늘 밤 당장이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번민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어딘가 희미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게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긴장과 슬픔, 그리고 낯선 환경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탓이리라. 잠시 후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아침, 이곳에서 첫 접객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그날 꿈조차 꾸지 못하는 깊은 잠에 빠졌다.
가게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서자,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나와보니 대신 과자봉지 접듯이 접힌 연노랑색 쪽지와 카운터 너머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방금 맡았던 그 커피 향이 더욱 짙어졌다.
쪽지 안에는 로스팅하는 방법과 레시피, LP판으로 음악 트는 방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잠시 출장을 다녀오겠다."라는 노인.. 아니 점장의 짧은 글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문득 거대한 스피커 두 대가 놓인 가게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어제와 같으면서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마치 내가 이곳의 일부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고요 속에서, 나는 불현듯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장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언제 다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것은 오직 이 낯선 공간과 '접객원'이라는 막연한 임무뿐이었다.
쪽지를 읽고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급하게 준비를 마쳤다. 어설프게 쪽지를 참고하여 커피 머신을 점검하고, 찻잔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노인의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 덕분에 기본적인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준비의 마지막으로 LP판을 만져보았다. 묵직한 무게감과 독특한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어제는 격한 감정에 휩싸여 이런 음악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과연 어떤 소리를 품고 있을까.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리자,
"딸랑!"
그때, 귀를 찢을 듯한 종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첫 손님이었다. 예상보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준비되지 않은 채로 이곳에서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