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참 이상하다.
"어릴 땐 죽는 게 그렇게 무서울 수 없더라."
왜, 어디서, 뭘 봤는지 나는 또래와 같은 디지몬과 포켓몬을 보면서도 그런 먹이 하나 나에게 끼어있었다.
세간이 말하는 '정상'의 틀이었는데, 누가, 무슨, 어떤 게 계기가 돼서 고작 10살도 안된 '부진아'에게
그런 운을 띄워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20살 때 처음 찾아본(공부도 아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그것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된 글을 봐도 이해 못 해서 정확히 서른넷쯤 대략 알게 된 현재도 '부진한 아저씨'다. 사람뇌는 일정한 구간을 거쳐 서서히 가 아닌 확 꺾이듯이 늙는다는 말을 친구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덜컥 겁이 나더라. 그 말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겪은 세상은 한 번씩 그러하다는 힌트가 종종 있었다. 결국 자기 관리는 철저해야 한다. 다음 포인트에 도달하기 전까지 미감과 사고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라고 2년 전 그 말을 듣고 나서 현재까지. 내가 도파민에 절여져 잠깐씩 스스로에게 부재중일 때 경각심을 심어주는 장치 같은 말이 되어주었다.
사실 성격 상 나에게 다가올 종점이야 결국 나의 죽음이고 이걸 어떻게 마주 하느냐에 대한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핵심일지 언데, “왜 그리 서두르냐” 의문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답은 간단했다.
“제대로 해야 하니까”
나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삶의 고민을 또렷하게 오래도록 적확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10살 무렵의 소년인 내가 나에게 일갈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꾸짖음을 허상에게 들어도, 아니, 들어서인지. 나는 스스로 기대를 쉽게 저버리고는 한다. 비슷한 일례로 타인이 나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을 예로 들어볼 수 있다.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것은 타인이 생각한 나의 이상이니까. 못 미친다고 내가 죽어야 되는 게 아닌 그 사람 이상 속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건 별 중히 여길 일은 아니다. 다만 상대에게는 유감일 뿐. 그러나, 내가 나를 죽이려는 위협은 성인이 될 때까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이어진다. 스물이나 스물 중반까지 부모의 언행과 다양한 성격의 또래 무리와 함께 지내면서 그 속에 ‘살아간다’ 보단, 시각을 틀어 ‘버텨온다’의 삶을 살 수도 있다.
종종 여러 사람의 불행을 들어보면
“스무 살이 되면 괜찮을 거야..”
“아이가 다 크면 괜찮을 거야..”
“방학이 시작되면 괜찮을 거야..”
“주말이 오면 괜찮을 거야..”
“이것만 갚으면 괜찮을 거야..”
등 혼자 있을 확률이 높은 곳으로 숨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베르세르크 명언처럼,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를 실감하게 될 거고, 마주하고 또 버티는 길을 선택하는 일들이 생겨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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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인 죽음. 통념에 의한 죽음. 관념에 의한 죽음
계속 피하거나 맞이할 것 투성이에 단련되거나 날개가 꺾이면서 이도저도 못하고 ‘내몰린다’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구석으로 내몰리고는 한다.
내가 좋아하는 태엽 감는 새에는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가질 수 없는 인생에 길들면, 끝내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그것조차 모르게 돼. “
아르바이트하면서 이제 30이 막 된 당시 나에게 너무 깊게 박힌 문장이었다. 저렇게 죽인 것은 타인이 아닌 나라는 사실이 꽤 잔인하게 느껴졌다. 아마 내가 ’ 부진한 어른‘인 것에 이견을 댈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나도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누리고 던지고 싶었지만 걱정이 앞서 틀어막고 살았던 흔적이 나에겐 성흔이 아닌 자상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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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짚고 나서 직면하면 사람들은 점차 강해진다.
그렇게 질문이 많은 나에게 해답을 명쾌하게 줬던 친구도 이제는 ‘결국 죽으면 끝나’ 이 이상 말을 아낀다. 그가 본 세상은 내 세상과 다르지만 위로가 된다. 단순 물리적 죽음과 주변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죽음들에 대해 서서히 적응하고 대비를 할 수 있을까. 때에 맞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