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손님

만일✳✳✳+

by twohfiveownn

'안식은 어떤 걸까? 그건 젖은 빵 같은 일말의 찜찜함도 없을까? 나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하게, 다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빗소리가 잦아든 창밖은 여전히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릿광대가 떠난 후, 항상 그렇듯 가게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던 자리들을 말없이 정리했다. 지난 며칠간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두 명의 광인, 미치광이면서, 한편으로는 진솔하게 인간의 본위를 들어내는 손님들이었다, 그렇게 묘한 감각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훔쳐보는 관찰자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바로잡는 구원자도 아니었다. 그저, 한 발짝 더 나아간, 나 자신이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낡은 찻잔들을 닦고, 테이블을 깨끗한 천으로 정성껏 쓸어내렸다. 이 모든 물리적인 행위들은 어쩌면 내 마음속의 혼란을 정리하려는 의식적인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왠지 더 이상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 피곤하고 쉬고 싶었다.


나는 문을 잠그고 잠시 나와서 빗물이 씻어낸 차가운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고요했다. 낮의 소란스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가로등 불빛은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번졌다. 이전에 내가 앉아서 절망하며 울었던 벤치가 보였다. 추잡하고 불행하고 맞닥뜨리지 못해 도망쳤던 그 자욱이 거기엔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기로 흘러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일'이라는 공간에서 쏟아져 나온 감정의 파편들이 내 발밑에 흩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연전을 치른 장수처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과 사람들이 묵직했었다. 그만한 담도 없고, 기개도 없는 인간을 점장은 무슨 연유로 나를 앉혀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었다.

그들은 표면상 공격적이었지만,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라는 의문을 거듭해서 던져주었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불행을 파괴로 증명하려 했고, 어릿광대는 자신의 불행을 연극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이라는 공통된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그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극과 극이었다. 나는 그들이 단지 미치광이가 아님을 알았다. 그들의 행동 이면에는 세상을 향한 증오와, 자신을 향한 혐오가 뒤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을 미치도록 괴롭게 했던 순수한 사랑과 외로움이 있었다.

다소 거칠지만, 분명 필요한 이야기들이며 다들 형태와 강도만 다를 뿐 많은 사람들과의 교집합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어쩌면 내가 외면했던 나 자신의 또 다른 그림자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죄책감과 나약함을 마주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고,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짐을 덜어냈다. 나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보고, 그들의 진실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밤비가 내려 흰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났고, 수증기 속을 헤매는 것이 구름 안을 산보하는 기분이었다.

조금 정리가 된 것 같아 나는 가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숙소라고 내어진 이 좁은 방은 '만일'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달리, 세상의 모든 평범함과 고독을 응축해 놓은 듯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앉았다. 축축한 코트를 벗어던지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몸은 지독하게 피곤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내 머릿속에는 피아니스트의 차가운 눈과 어릿광대의 무너진 가면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내 것이 되어버린 듯, 내 의식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 내 심장은 아직도 격렬하게 뛰고 있었지만, 그 뛰는 소리가 더는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피로가 나를 짓눌렀지만, 그건 헛된 감정 소모가 아닌, 의미 있는 싸움 뒤에 찾아온 피로였다. 나는 오늘,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걸음을 내디뎠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진실을 두 번의 경험으로 거듭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묵묵히 받아들이며, 기나긴 하루의 끝을 맞이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맑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밤새 내린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고 지나간 듯했다. 매번 비와 동행하는 손님을 만나서 돌아갈 때 그들은 비구름을 같이 거두어 가는 건 아닐까? 아무튼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리했던 어제의 뿌연 기억들이 햇살 아래서는 훨씬 선명하고, 동시에 덜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나와서 홀을 한번 가볍게 둘러본 뒤 어제 미처 정리하지 못해 널브러진 낡은 앞치마를 집어 둘렀다. 이제 이 행동은 내게 단순히 옷을 입는 행위를 넘어선,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게의 문을 열고, 창가의 덧문을 걷어 올렸다. 닫혀 있던 가게 안으로 맑은 햇살이 스며든다. 나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테이블과 의자들을 꼼꼼히 닦아냈다. 어제 쏟아졌던 감정의 흔적들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간 있었던 비현실적인 현장들이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나는 낡은 턴테이블로 다가갔다. 어젯밤의 소란스러움이 남긴 잔향을 지우고 싶었다. 검은색 바이닐 판을 조심스레 올리고, 삐걱이는 암 리프트를 들어 올렸다. 얇고 긴 바늘이 조심스럽게 판 위로 내려앉자, 아주 작은 '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피아노 선율은 빗물이 고인 웅덩이 위로 떨어진 햇살처럼, 가게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음악에 맞춰 나는 차분히 가게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손때 묻은 나무 테이블은 마른 천으로 닦을 때마다 묵직한 윤기를 냈다. 먼지가 가득했던 창가 선반 위에는 이름 모를 작은 화분들이 햇빛을 흠뻑 받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찻잎 조각들을 쓸어 담고, 비뚤어진 의자들을 바로 세웠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벽면의 빛바랜 그림들과 구석의 낡은 책장들이 음악과 함께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반짝이는 햇살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존재들이, 빛을 받자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끓는 물이 내는 미세한 소음은 피아노 선율에 섞여 조용한 화음을 이루었다. 찻잎이 담긴 통을 열자 향긋한 냄새가 가게 안에 퍼졌다. 더 이상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는 평소와 똑같이 준비했다. 이 모든 행위는 내가 스스로에게 '나는 준비되었다'라고 선언하는 과정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초조함 대신 고요한 기다림이 감돌았다. 한낮의 햇살이 창을 통해 가게 바닥에 길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였다.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렸다.

딸랑

역시나 맑고 깨끗한 소리. 불길한 예감도, 불안한 울림도 아닌, 왠지 너무나도 평범하고 익숙한 소리였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던 익숙한 품처럼. 그리고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람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멈춰 있었던 그 모습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던 머리카락은 길고 검은 끈으로 묶여 있었고, 빗물이 닿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흐트러져 있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은 투명하고 깨끗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다. 옅은 핑크빛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미묘하게 쳐진 눈꼬리는 그녀가 겪었을 오랜 피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이 가게의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리 삶의 현실적인 무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Y

나는 얼어붙은 채, 그녀의 이름을 겨우 입에 올렸다.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그녀의 이름은 오랜 감옥 생활 끝에 겨우 숨을 쉬는 죄수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 단 한 글자는 내가 그녀를 떠나온 이후 외면했던 모든 후회와 사랑의 잔해를 응축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도 잠시나마 흔들렸다. 그 불안한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함께, 어쩌면 나만큼이나 이 만남을 두려워했던 미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맑고 투명한 선율은 진공처럼 모든 소리를 빨아들인 채, 슬픔을 머금은 동시에 고요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선율은 우리 둘 사이의 어색하고도 무거운 공기를 감싸 안으며, 마치 더럽혀진 물을 조금씩 정화시키려는 듯, 흐릿했던 기억들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길고 긴 침묵을 깬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여기... 카페였구나." 지극히 평범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외면하는 듯한 말투.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내 의식은 익숙한 행동을 따라갔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카운터로 향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역할은 '점원'이라는 방패를 드는 것이었다.


"차 한잔 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까?" 그녀의 질문에는 음료에 대한 물음이 아닌, 이 모든 만남이 괜찮은지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끓는 물이 내는 미세한 소음은 내 불안한 심장을 대신해서 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좋아했던 카모마일 차를 우려냈다. 따뜻한 김이 찻잔 위로 피어오르고, 노란색 차가 그녀의 앞에 놓이자, 그녀는 잠시 그 찻잔을 응시했다. 마치 과거를 담아낸 유물처럼.


어색한 공기는 차가운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서서히 증발했다. 우리는 마주 앉았다. 낡은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작게 울렸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이 좁은 공간이 우리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심연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시간의 공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손으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기를 느끼려는 듯, 그 온기로 자신의 긴장감을 녹이려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저 찻잔 위에 떠다니는 찻잎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작은 찻잎의 불규칙한 움직임만이, 지금 내가 감당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길고 긴 침묵 끝에,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이 한마디에 그동안의 원망과 후회, 보고 싶었다는 마음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무수한 질문들이 하나의 단어로 압축된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내 눈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내가 외면했던 모든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럼, 네가 도망친 그 세상 속에서… 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나의 더 깊은 상처를 파고들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말이 그리는 그림을 보았다. 내가 떠나온 후, 온전한 불행과 죄책감에 갇혀있던 나 자신이 아니라, 현실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삶을 재건해 나갔을 그녀의 모습을. 그녀의 대답은 단순히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망친 세상에서 그녀는 버티고 싸웠다는 사실을 담담한 선전포고처럼 내 앞에 던져놓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질문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너는… 어때?"

나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럭저럭. 그냥... 여기에 있어." 나의 대답은 그녀의 대답과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가 '노력'과 '삶'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저 '존재'만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녀 앞에서 고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보다 '조금만 더' 솔직해 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짧은 대답 뒤에 숨겨진 모든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시간이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냥...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어."

내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나는 Y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불행의 시작이 마치 도미노처럼 한순간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일에 대한 회의감, 갑작스러운 해고, 그리고 그날의 비. 그날 밤, 시선을 놓쳐버린 강아지의 식어버린 몸을 부여잡고 차갑게 신음하는 나의 모습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내게 남은 건 불행뿐이었고, 그 불행의 원인을 세상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내 잘못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모든 것, 이런 사고방식인 나는 지난날의 너까지도 버리고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렇게 며칠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어."

나는 낡은 간판의 '만일'이라는 글자를 발견했을 때의 기묘한 느낌, 그리고 가게 안으로 나를 끌어당겼던 묘한 이끌림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나를 앉혀둔 점장의 무표정한 얼굴과, 이 가게가 '각자의 문제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불행을 가득 안고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라는 그의 알 수 없는 말까지 모두 전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자신의 불행을 파괴로 증명하려 했던 피아니스트와, 그 고통을 우스꽝스러운 연극으로 포장했던 어릿광대. 그들을 만나는 과정이 마치 나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사실 내가 외면했던 나 자신의 그림자였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죄책감과 나약함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들이 미치광이인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어. 그들은... 그냥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나처럼."

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동안 나는 이 가게에서 손님을 받으며, 이 모든 게 일종의 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었나 봐. 그건 벌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가두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감옥이었어. 그리고 나는 너를 만난 순간, 그 감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외면할 것도 없었다. 내 앞에 앉은 Y에게 나는 이제 완전히 벌거벗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Y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으려 애썼지만, 그녀의 표정은 깊은 바다처럼 고요했다. 그 침묵은 그가 방금 털어놓은 고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과 연결고리를 찾는 시간인 듯했다.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겠어."

그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네가 떠난 후, 나는 정말 혼자였어. 너를 잃은 슬픔과, 너를 두고 먼저 떠났다는 죄책감이 매일 짓눌렀지. 그렇기에 나는 애써 그 모든 감정을 외면하려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어. 성공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바쁘게 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 덕분에 나는 꽤나 성공한 사람이 됐지. 사람들은 '참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알았어. 그 모든 성공이 단지 너를 버리고 온 나 자신의 그림자를 숨기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였을 뿐이라는 걸."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는 늘 되돌릴 수 없는 질문이 지워지지 않았어."


' 그때 서로가 서로를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Y는 조금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뗄 준비를 했고, 머지않아 입을 열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시달렸어. 겉으로는 완벽한 내 삶이, 속으로는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선명했거든. 나는 그 공허함에 쫓기듯,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어. 특별한 목적지도 없었지. 그저 이 공허함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다 오늘, 나는 정처 없이 빗속을 헤매다 우연히 이 가게를 발견했어. 낡은 간판에 적힌 '만일'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마치 누군가 내게 '바로 여기야. 네가 찾던 곳'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어. 이 가게는 내가 평생 외면해 왔던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 것만 같았거든."

"나는 네가 도망쳤던 세상에서 나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어. 그리고 오늘, 네가 멈춰 선 이 공간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그리고 너를 마주함으로써 우리 관계의 모든 종지부를 찍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것을."


"내가 여기서 멈춰 서야만, 우습게도 내 삶이 온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녀의 눈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 공허감을 끝내기 위해 온 거야."


Y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귀에 닿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죄책감이라는 벽을 무너뜨리는 굉음처럼 울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그동안 그녀가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오해했었다. 그녀의 삶은 고통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으리라 멋대로 단정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수히 많은 노력으로 재건한 그 화려한 삶 뒤편에도 자신이 외면했던 공허함과 똑같은 심연이 존재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갇혀 있던 과거라는 감옥이 비단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존재는 이제 그에게 단순한 과거의 망령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도망친 삶을 대신 살아낸, 또 다른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크기를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모든 노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가 스스로를 가둔 과거라는 감옥의 열쇠를 들고, 그 앞에 서 있었다.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이번 침묵은 어색함이나 회피가 아닌, 서로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고요함이었다. 그는 입을 열려 애썼지만, 어떤 말도 그의 목을 넘어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그 모든 것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찻잔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천천히 그녀의 손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의 손은 차가웠고,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나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지만, 그 한마디에는 내가 외면했던 모든 시간과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 한마디는 과거라는 감옥의 굳게 닫혔던 문을, 비로소 아주 조금 열어젖히는 소리였다.

차가운 손이 맞닿자 그녀는 흔들림 없이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내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견고했다. 나는 그 온기 속에서 그녀가 혼자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밤들과 싸워 이겨낸 시간의 무게를 느꼈다. 내가 과거에 갇혀 있을 때, 그녀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단순히 그의 손을 마주 잡은 것이 아니라, 나를 스스로를 가두었던 벽을 허물어뜨리는 단단한 망치와 같았다.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것은 거부의 몸짓이 아니었다.

도리어 나는 새로운 결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건넬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나의 눈빛에는 지난날의 모든 후회와 함께, 이제 겨우 시작된 삶에 대한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은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깊고 고요한 호수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마치 내가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가 나를 두고 떠났을 때, 나는 매일 밤 울었어."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짧은 한 문장이 미안하다는 말로 모두 지워낼 수 없는 고통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던진 말이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용서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상처의 결과를 보여주러 온 것이었다. 나의 눈빛에 담겨있던 희망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의 미안함이 그녀의 모든 아픔을 치유해 줄 것이라는 뻔한 기대는, 너무나 현실적인 그녀의 말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괜찮아. 이제는."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보고 싶었고, 미웠어. 하지만 그 감정들은 결국 나를 좀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나는 너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고, 나의 불행이 오롯이 너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어.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어."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과거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고난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더해져 있었다.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나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어. 그래서 네가 나에게 '미안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네가 결국 너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찾기 시작했구나, 하고 생각했어. 너의 그 한마디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드디어 내게 갇힌 채 멈춰 섰던 그 시간에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는 의미니까."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따뜻한 체온을 지닌,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이제는, 네가 괜찮아질 차례야."

그녀의 말은 나를 향한 구원이 아닌, 나 자신을 구원할 힘이 내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지막한 외침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고 이제야 겨우 같은 시간 위에 서 있었다는 걸.


"이 매듭을 잘 짓고 나면 너도 괜찮아질 거야, 분명."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에게 내민 손을 잡았고, 그 온기는 나에게 묵묵히 걸어갈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낡은 카페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의 침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바깥의 빗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


주변은 이전의 아늑한 환경에서 오늘따라 밝아보였다. 왠지 모든 게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뀐 것만큼,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때,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렸다.

딸랑.

이전의 불길함이나 불안함이 아닌, 그저 평범한 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앳된 얼굴의 젊은 연인이었다. 빗물을 털어내는 그들의 모습은 싱그러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막 시작된 사랑의 설렘이 가득했다.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향을 물었고,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같은 음료를 주문했다. 무슨 기이한 상황인지 이해 못 한 채, 나는 따뜻한 차 두 잔을 우려내어 그들 앞에 놓아주었다. 그들의 대화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까지도 확인하려는, 유치하고도 간절한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낡은 코트 주머니에서 삐죽 튀어나온 영화 티켓 한 장을 보며, "너, 이 영화 나랑 같이 본 거지? 다른 사람이랑 본 거 아니지?"라며 엉뚱한 질투를 했다. 여자는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남자의 볼을 꼬집었다.


어찌 됐든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보였고 환상이던, 진실이던 위협이 느껴지지 않아서 일반 카페 같은 이 전경에 적응하려고 마음먹었다. 왠지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정리가 한결 수월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Y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들은 사랑의 첫 페이지를 읽고 있는 거야.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상상도 못 하겠지."

"그럴까? 저렇게 유치하게 확인하고 집착하는 게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너의 전부가 되고 싶다'는 유치한 욕심."

내가 묻자 Y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결핍일 뿐이야. 사랑은 본질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불안이지. 서로가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쌓기 위한 유치한 몸부림. 저 유치함이 깨질 때, 그때야말로 진짜 사랑이 시작되거나, 아니면 모든 게 끝나는 거지."

그때였다.


이어서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딸랑.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가 투박하게 들어섰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남편은 퉁명스럽게 "따뜻한 차나 한 잔 줘"라고 말했고, 아내는 그가 건네는 젖은 손수건으로 그의 옷깃에 묻은 빗물을 닦아주었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해묵은 농담처럼 익숙하고 편안했다.

Y가 그들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게 바로 사랑의 두 번째 페이지야. 저들은 이제 '너의 전부'가 되기 위한 유치한 싸움은 끝냈어. 대신 '너의 한 부분'이 되기로 합의한 거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유치한 욕심에 사로잡혀 전부가 되려 했지만, 결국 그 한 부분이 될 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도망쳤었다. 나는 우리가 마주 앉았던 바로 이 테이블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다시 종이 울리고, 세 번째 손님이 들어섰다. 딸랑.

그는 말없이 혼자였다. 늘어난 스웨터 차림의 그는 창가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길 건너편의 꽃집을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차를 마시지도, 노트북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창밖을 응시했다. 그는 꽃집에서 꽃을 포장하는 여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나는 낯선 감각에 물었다. "저건 무슨 사랑일까?"


Y는 나를 보며 조용히 답했다. "사랑의 세 번째 페이지. 바라보는 사랑. 고백하지 않아도, 소유하지 않아도, 그저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사랑. 하지만 동시에… 그건 가장 안전한 도피처이기도 해. 실패할 용기가 없어서 시작조차 하지 않은, 가장 순수하고도 비겁한 사랑이지."

그는 말없이 차 값을 계산하고 떠났다. 그가 떠나고 다시 종이 울렸다. 딸랑.


이번에 들어선 것은 불안하게 스마트폰을 쥔 남녀였다. 그들은 어색하게 서로의 눈을 피하며 음료를 주문했다. 대화는 오직 스마트폰 앱에서 미리 짜인 듯한 질문들로 이어졌다.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취미가 뭐예요?" 그들은 상대방의 진솔한 모습을 보려는 것보다, 자신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저건… 우리가 겪지 못했던 유형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Y가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사랑의 네 번째 페이지. 상품화된 사랑. 서로의 불완전함을 마주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완벽한 프로필 뒤에 숨어 서로를 탐색하는 사랑. 그들은 스스로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소비하는 중일지도 몰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은 온몸의 힘을 줘 휴대전화를 꽉 쥐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반복해서 말했다. "아니,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녀의 말과 달리, 그녀의 온몸은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며칠 전의 나 자신을 보았다.

"저건… 사랑의 마지막 페이지야." Y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이 끝나고 남은 자리. 고통과 절망,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만이 남은 자리. 하지만 저 페이지가 끝나야만…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아무것도 못하고 망가질 수도 있지."


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카페 안의 모든 이야기들이 거대한 하나의 조각그림처럼 맞춰지는 듯했다. 우리의 사랑은 이제 유치한 욕심도, 해묵은 농담도 아닌, 그저… 이 공간 안에서 묵묵히 걸어가야 할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는 Y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과거의 아픔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저 허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아마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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