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고 노는 게 재밌는 이유
감기는 조심하세요
초등학생 때, 평소처럼 등교를 했던 맑은 날,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렸다. 태풍 '매미'가 온 것이다.
그날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씩씩하게 뛰어와~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릴게"
나보다 먼저 학교 공중전화를 통해 보호자들에게 연락을 했던 다른 친구들은 자신을 데리러 올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거나, 또 다른 친구들과 그들의 보호자과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어른과 함께 집에 되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집에 전화를 하면 부모님이 데리러 올 것이라고, 정말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엄마, 비가 많이 와서 학교가 빨리 끝났어."
"그래? 빨리 와 그럼"
"데리러 안 와?"
"코 앞인데 혼자 못 와?"
"갈 수 있지. 근데 우산이 없는데?"
"그냥 맞고 얼른 뛰어와버려~ 집에 와서 씻으면 되지"
"그런데 다른 애들은 다 데리러 오던데?"
"게네들은 게네들이고~ 우리 하루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씩씩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빨리 뛰어 와 버려! 재밌을걸? 언제 이렇게 비 맞아보겠어. 하루 씩씩하게 뛰어오는 동안 엄마는 그동안 맛있는 거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어~ 금방 갈게"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나는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부모님이 데리러 안 오시니?"
"네. 코 앞이라 뛰어가면 돼요."
"우리랑 같이 갈래?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빨리 뛰어가면 돼요! 엄마가 맛있는 거 만들고 기다린다고 했어요!"
"어머, 너무 씩씩하다~ 어머님이 누군지 너무 부럽네."
"ㅎㅎ안녕히 가세요~ 저는 이제 갈게요!"
그렇게 나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갔다. 처음에는 달려갔는데, 나중엔 걸어갔다.
빨리 가든 천천히 가든 비가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데 내가 뛰어도 다 젖는 건 똑같은 것 같았다.
가방도 처음엔 머리 위로 올렸지만 나중엔 편하게 메고 갔다. 어차피 다 젖어서 샤워해야 하는데 머리도 같이 씻을 것 아닌가. 가릴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게 은근히 재밌었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셨다. 포근한 수건,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우리 하루 왔어? 쫄딱 젖었네!! ㅋㅋㅋ"
"응, 쫄딱 젖었어!! ㅋㅋㅋ 다른 애들은 다 엄마아빠가 데리러 왔는데~ 나는 씩씩하게 혼자 갔더니~ 다른 어른들이 엄~~~~ 청 부러워했어!! ㅋㅋㅋ"
"그럼, 당연하지! 우리 하루가 얼마나 대단한데!! ㅋㅋㅋ 많이 부러워했어??"
"응!! 어떤 아줌마가 같이 가자고, 나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냥 뛰어간다고 했어!"
"그럼~ 그냥 뛰어와버리면 되지 ㅋㅋ 우리 하루 얼마나 씩씩한데~"
"그렇지! 근데 내가 뛰어간다고 하니까 그 아줌마가 나 씩씩하다고, 엄마가 부럽대!!!"
"그랬어?ㅋㅋㅋ 그렇지, 많이 부럽지~우리 하루는 혼자서도 이렇게 잘 오는데!"
"근데~ 그 말 듣고 다른 어른들도 다 나 쳐다봤는데 다 부러워하는 것 같았어 ㅋㅋㅋㅋ"
"그랬어?ㅋㅋㅋㅋ 역시 우리 하루가 최고네~"
처음엔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아서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더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남았다.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태풍을 뚫고 학교로 아이들을 데리러 온 어른들이 힘들어 보였었는데, 우리 엄마는 따뜻한 집에서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니 내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아주머니가 혼자 뛰어가겠다는 나를 칭찬하며 부럽다고 말해 줄 때, 그 말에 동의하며 나를 바라보던 주변의 어른들의 눈빛 모든 것이 짜릿했다. 실상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다. 이미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자신감 뿜뿜 하는 아이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로도 몇 번 하교시간에 갑자기 비가 내린 경우가 있었는데, 집에 연락하지 않고 그냥 얼른 뛰어가버렸다. 태풍이 올 때도 혼자 집에 잘 갔는데, 이슬비나 소나기쯤은 별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나는 콩콩이(=방방, 퐁퐁)를 정말 자주 타러 갔다. 어느 날 콩콩이를 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른 아이들은 비가 와서 집으로 모두 되돌아갔는데, 나와 내 친구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콩콩이를 관리하시는 할아버지랑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아까는 아이들이 많아서 주고 싶은데 못주셨다면서, 추우니까 먹으라며 따뜻한 감자를 주셨다. 감자를 다 먹고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콩콩이를 타고 싶었던 우리는 그냥 비 맞고 타자며 그대로 콩콩이 위로 올라갔다. 이 날의 기억은 살면서 가장 재밌었던 기억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점프를 한번 하고 내려올 때마다 팡! 소리가 나며 내 주변의 물방울들이 위로 솟구쳤다. 마치 내가 영화나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필살기를 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가 독차지한 콩콩이 위에서 열심히 뛰어놀았다. 한참을 뛰어놀았는데도 비가 그칠 낌새를 보이지 않아, 콩콩이할아버지의 걱정에 따라 우리는 감기 들기 전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원 없이 뛰어놀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고,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그 후로 비가 많이 쏟아지는 날에는 왠지 신나는 기분이 든다.
그 후 성인이 되어서도 비를 흠뻑 맞은 일이 있다. 친구가 남악 신도시로 이사를 해서 친구 집에 놀러 갔었다. 새로 생긴 도시 구경도 할 겸, 생태공원으로 걸어서 산책을 간 것이었는데 꽤 거리가 멀었다. 한참 생태공원의 예쁜 모습에 감탄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졌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왕 쫄딱 젖은 거 택시를 타지 않고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많은 비를 30분쯤 맞으니 오들오들 떨리며 추웠지만, 너무 재밌었다. 친구집에 도착해서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우리의 흥미로운 모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쨌든 재밌었으니까.
그렇다고 매번 비를 맞고 다녔던 것만은 아니다. 고등학생 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후 집에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 날이 있었다. 이 날은 핸드폰으로 아빠에게 끝나서 집에 가는데 비가 온다고 연락을 했었다. 내가 태풍을 뚫고 뛰어간 이후로 비가 오면 얼른 뛰어서 맞고 가는 게 우리 집 국룰이었는데, 아빠는 그날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아주 흡족했다. 게다가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어른은 우리 아빠가 유일했다. 어깨가 으쓱해지며 뿌듯함과 행복함을 동시에 느꼈다. 게다가 아빠는 여분의 우산을 2개나 들고 왔다. 하나는 내 거, 다른 하나는 내 친구를 위한 우산이었는데, 기분이 매우 좋아진 나는 내 우산도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고 아빠의 우산을 함께 쓰고 집에 돌아갔다. 이 것 또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직장인이 되고, 어느 날 엄마와 대화하던 중에 초등학교 때 비 맞고 집에 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재밌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는 사실 그때 데리러 가고 싶었다고 말하셨다.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우리 집에는 차가 없어서 그냥 뛰어오라고 했다고.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내가 씩씩하게 잘 와서 너무 대견했다고. 사실은 나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큰 불만 없이 그냥 뛰어가겠다고 답했었다. 나 때문에 엄마가 비를 맞는 게 싫기도 했고, 사실 비는 좀 맞아도 괜찮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나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비와 관련된 모든 추억들이 다 행복하다.
그러니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