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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퍼 May 09. 2022

워케이션, 일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강릉 워케이션 일기 1

강릉으로 워케이션을 떠나왔다. 걸어서 2분 거리에 바다가 있고 나무들이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소나무 숲을 산책할 수도 있고, 날이 차지 않으면 퇴근 후 피크닉 매트를 깔고 바다 앞에 누워 있을 수도 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는 루틴은 같지만, 여기가 내 10평 남짓한 자취방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도를 준다.


예전에 쓴 글 중 일부를 발췌해본다.

어떠한 점에서 호텔이란, 남의 집이란, 여행이란 영화같기도 이데아같기도 하다. 근심과 책임, 유지와 보수가 없는 어딘가의.  이 속에는 슬픔의 관념이 없다. 허망함과 소외의 기분도 없다. 부적 같은 대칭과 아름다운 색감만 남아있을 뿐이다. 전시된 남의 도시를 관음하는 행위에서 오는 해방감!


나는 지금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서 서울도 경기도도, 자취방도 오피스도 아닌 곳에서 일한다. 여기서 주제는 일과 나. 딱 두 가지다. 일을 하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나만 존재할 뿐이다. 가계부를 쓰는 나, 설거지를 쌓아두고 외면하는 나, 수챗구멍을 청소하는 나... 그런 나는 경기도에 두고 왔다.



"난 한 번도 채워졌던 적 없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채워지게. 사랑으론 안돼요." (나의 해방일지)

오늘은 일을 끝내고 바다 앞에 누워 <나의 해방일지>를 봤다.

사람의 입에서 '추앙'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살면서 처음 본 것 같다. (조금 당혹스러웠고 거부감도 들었다.) 이 인생이 재미없어 보이는 미정은 왜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한걸까. 사랑으론 왜 부족한 걸까. 추앙은 뭐가 다른가. 미정은 어디에서 해방되고 싶은걸까. 나는 왜 강릉으로 떠나온 걸까?


내가 워케이션을 떠나온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업무와 삶을 너무너무 분리하고 싶다

매일 보는 새로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모르는 영역의,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사람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일을 하러 떠나는 이유가 궁금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내게 선물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바다 보고 싶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워케이션을 떠나온 이유도 미정과 다를 바 없다. 그냥 해방되고 싶었다. 자취방에서 이루어지는 먹고사니즘의 일상과 생계 사이 경계 없는 헛헛함에서.


미정이 해방되는 방식은 우습다(?). 구씨에게 추앙받는 것. 사람과 도시, 지긋지긋했던 사랑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서도 해방이 아니라 귀속을 선택한다. 구씨가 자신을, 자신이 구씨를 서로 엮는 방식의. 나도 일상에서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더 잘 일하기 위해' 워케이션을 떠나온 것이니 미정과 다를 바 없다. 어딘가에서 완벽히 해방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어딘가에 완전히 속해지는 수 밖에 없다. 아마도 나의 해방은 강릉에서가 아니라, 다시 경기도로 돌아갔을 때 제대로 완성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매일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이런 풍경이 기다리고 있으니, 해방되는 기분을 강제로라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쉽게도 이번주 워케이션 프로그램 참여자가 나 뿐이라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겠으나, 오히려 좋다. 워킹아워에는 업무에 더 집중하고 혼자 여기저기 많이 걸어다니기로 한다.

(내가 참여한 워케이션 프로그램은 강릉 일로오션 4박5일 코스. 얼리 체크인을 신청해 일요일에 체크인 후 업무 준비를 미리 했다.)



일요일에는 간단하게 객실에서 업무 외 활동을 했고
오늘은 숲이 보이는 숙소 근처 카페에서 일했다
일로오션 프로그램에 참여한 덕에, 귀여운 온보딩 키트도 받았다


이번 워케이션에서 지킬 나와의 약속도 정했다.

매일 바다를 보며 산책이나 러닝하기

감사 일기 매일 쓰기

매일 다른 곳에서 업무하기

주간업무 to do list 끝내기

영화, 책, 드라마 보고싶었던 거 잔뜩 보기

배달이나 집밥으로 먹을 수 없는 메뉴들 탐구하러 다니기


아직 하루 일했지만 스케줄도 생각보다 빡빡하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러닝이나 산책을 하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다. 오늘의 투두를 확인하고 하나씩 클리어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사부작 사부작 걸어 근처의 밥집으로 가 회막국수를 먹는다. 점심을 먹고 바다 쪽으로 걸어가 노래를 들으며 바다를 구경하고, 워킹타임을 살짝 조절해 커피도 마신다. 카페나 호텔 로비로 돌아가 준비된 워킹존에서 업무를 하고, 업무시간이 끝나면 호텔로 올라가 밀린 드라마를 보고, 커튼을 걷어 바다 소리를 듣는다. 아는 동생의 자소서를 봐주고, 커피챗 전화를 받고, 과자를 먹으면서 친한 친구가 추천해준 책을 읽는다. 잠이 오면 살짝 졸았다가, 일어나서 객실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는 없는 TV 채널을 마구 돌리며 구경도 하고, 브런치 글과 일기를 쓰며 하루를 보낸다.

일을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일을 하는 나와 살아가는 나를 굳이 떼어두려 노력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잘, 굽힘 없이, 양립할 수 있게 두는 것도 참 좋다는.


이건 일종의 해방 활동이자 실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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