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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퍼 May 10. 2022

아무도 없는, 강릉 바닷가에서 일하기

강릉 워케이션 일기 2

강릉 워케이션 일기 1에 이어 작성하는 두 번째 일기.


아침에 눈이 너무 부셨다. 자취방도 남향이라 눈이 부시긴 했지만, 이렇게 눈을 뚫을 정도의 눈부심은 아니어서 생경한 아침 풍경이었다. 시간은 다섯 시 이십 분을 횡단하고 있었고, 나는 몸을 일으켜 일출을 보러 발코니로 나갔다. 이렇게 이른 시간 내가 알아서 일어난 건 거의 처음이다. 그것도 해를 보기 위해서. (학창시절 수련회에서 누가 머리카락을 발로 밟고 지나가도 절대 안 일어났던 나인데!)


매번 수련회 아침의 내 모습 (교관한테 혼나는 건 국룰)



나른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줄 알았지만 더 잤다. 그리고 딱 업무시간에 맞춰 기상했다. 기상과 동시에 대충 눈을 슥슥 비비고 객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뭔가 뉴욕에서 프리랜서를 하는 디지털 노마더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 기분! 때로는 이 기분이 중요하다.

이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나와의 채팅방에 짧은 이모지를 보내두었다. 하트와 근육.


일에 치여도 하루의 마무리는 운동을 하는 멋진 나, 바다가 보이는 호텔 객실에서 업무를 시작하는 근사한 나, 거창한 건 아니라도 매일 저녁 뉴스를 보는 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적인 나, 연애를 하는 로맨티스트 나... 뭔가를 할 때는 이런 기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이런 으쓱한 기분들이 쌓여 습관을 만드는 경우도 꽤 있으니. 꼭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자.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흘러가는 내 작은 감정들을 그냥 너그럽게 안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적어도 여기서는.




점심 시간 전, 잠깐 30분 정도 마이타임 오프를 내고 바닷가 오피스 설치를 했다. 별다른 장비를 준비하지 않아도 일로오션의 고미께서 캠핑 테이블과 의자, 담요, 에그, 파워뱅크까지 수레에 잔뜩 담아 빌려주셔서 뚝딱뚝딱 만들었다. (이번 차수는 참가자가 나 뿐이라 귀찮고 성가실 텐데도 매번 신경써주신 고미...)




오늘 나의 거점 오피스는 바다가 보이는 솔숲 한 가운데.




오피스를 다 설치(?)하고도 점심시간이 많이 남아 책을 읽었다. 열 장도 채 못 읽었는데, 이 바다와 솔숲을 눈 앞에 두고 책을 읽는 것도 꽤 건방진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덮었다.

그리고 그냥 바다를 멍하니 봤다. 삼십 분 정도.





그런데 가만히 있다 보니, 희한하게 자꾸 <나의 해방일지> 속 미정의 말이 맴도는 거다. (또방일지...)

"나를 추앙해요."

가끔 나는 사랑을 시작할  그이의 신도가 된다. 사랑하는 사이에 사랑이나 신뢰는 너무 흔한 말이라 멋없게 느껴져서 대체제를 찾은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 '애정' '믿음' 같은 말들에  취약해진다. 우리로만 완성되는... 그러고는 모든 부정의 문장 앞에 반전문으로 그게 것이다. 예컨대 '나는  사랑했는데 너는 !' 같은. 그래서 나는 사랑같은 관념을 빌미로 누군가에게 쉽게 의지하거나 속내를 내비치는  싫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나 자신을 쉽게 사랑하는 걸 용납하지도 못한다. 얼굴만 아는 지인의 승진에 백 프로의 기쁨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거나, 내가 생각하는 방향성이 조직원들에게 공감을 사지 못하거나, 거울 속 얼굴의 모공이 아주 조금 어제보다 커보이거나... 사실 그런 작은 순간에 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를 잠깐 놓기로 결심한다. 아주 쉽게.




아무튼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스워졌다.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하는 미정이 안타까우면서도 바보 같이 느껴졌다. 진짜 해방되고 싶다면, 누구한테 나를 추앙하라고 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먼저 추앙하면 될 일 아닌가?

그리고 결론을 냈다. 적어도 이 일주일 간의 워케이션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를 추앙해보자. 집안일 하는 나, 서울 핫한 카페를 다니길 좋아하는 나, 머리를 자르고 실망하는 나, 다이어트 하는 나, 층간소음에 열받아 하는 나, 끼니 고민하는 나, 그런 나 없이 일하는 나와 쉬는 나만 존재하는 이곳에서. 조언이나 충고, 비판이나 평가 없이.


그렇게 생각하자 가만히 있는데 별안간 눈물이 나는거다. 어딘가 콕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먹고 사느라 생긴 잔기스들이 따끔거린 것일지도 모른다. 딱히 이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퇴근을 하면 밥을 먹고, 밥을 먹으면 빨리 치우고 뉴스를 보고, 간단하게 운동을 하고, 밀린 메일을 보고, 1.25배로 전투적으로 드라마를 보고,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단정하게 들어가 눕는. 이렇게 점심시간에 멍하게 하루를 곱씹어보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일상도 노동처럼 여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추앙이 말이 웃겨서 그렇지, 별 것 없지 않을까?

삶의 면면에 난 잔기스들을 보면서도 구박하지 않고 '나 꽤 다이나믹하고 멋진데?!'라고 할 줄 아는 것.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오히려 좋아'로 넘기는 것. 취미가 없다면 '나이 들 때까지 탐험할 수 있겠다'며 호탕하게 웃는 것. 뭐, 그 정도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나에게 주는 추앙.




바다는 그냥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분주한 건 나뿐인 것 같다가도 귀를 기울이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이 끝나는 주말에는 추워도 꼭 바다에 들어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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