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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물결치다.

한은선 <바람이 분다, 가라>

by 이현 Mar 05. 2025

까만 밤하늘에 폭발한 흰 별이 타오르고  있는 것일까. 깊은 바닷속 촉수를 뻗은 성난 해파리가 이글거리는 것일까.

'바람이 분다, 가라'의 표지그림이자, 주인공의 죽음을 밝히는 주요 단서가 되며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먹그림은 화가 한은선의 작품이다.

한강작가는  실제로 이 그림을 직접 보고 영감을 받아 소설의 모티브를 생각했다고 한다. 한 장의 그림이 대가의 손을 거치며 명작 소설을 탄생시킨 셈이다.

당시 한강작가는 자연과학,특히  천체물리학 에 관해 관심을 가질 때였고, 이것이 이어져오던 미술에 대한, 예술에 대한 관심과 맞물리며  완성한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외에도 음악, 연극, 철학 등 방대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작가의 관심이 등장인물을 통해 세계가 확장된다. 더불어 독자의 세계도 넓어진다.


화가인 인주의 의문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한 친구 정희의 여정에서 삶과 죽음, 존재의 고통, 인간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다.

서인주가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삼촌의  먹그림. 삼촌 이동주는 우주의 기원과 천체 물리학에 관심이 많고 이를 소재로 거대한 먹그림을 그렸다.  학창 시절 정희는 인주의 집을 드나들며 삼촌의 먹그림에, 삼촌의 천체물리학적 관심, 우주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 절친인 정희와 인주는 각자의 인생에서 지닌 비극을 서로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한편, 가족의 비극을 안고 살아가는 몸이 불편한 삼촌에게 정희는 사랑을 느낀다.


이 책에는 화가와 그림이 중심이 되면서 '우주, 별, 빛'에 대한 정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흰 점 같은 별들 위로 거대하고 둥글게 퍼져나가는 불꽃을 나는 들여다본다. 붉으면서 푸르고, 희면서 검다. 죽음이면서 시작이다. 늙은 별이 폭발한 바로 그 에너지로 희부연 성긴 구름들 사이에서 새별이 태어난다.  -p.18-


한지에 염료가 스며들며 조금씩 염색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한은선의 설치작업은 마치 거대한 우주 속에 파동 치는 물결과 같다.

한은선은 동양화를 전공하였지만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동서양의 구분이 없는 독특한 추상작업을 내놓았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먹을 입힌 이합 한지를 그 위로 펼치고, 원반모양의 두툼한 종이죽 덩어리를 한지 가운데 붙여 놓았다. 커다란 정원용 분무기로 종이죽 위에 흠뻑 물을 뿌리면 흰 물길들이 둥글게 먹을 밀고 번져 나갔다. 수십일이 흐른뒤 마침내  물길이 다 번져간 자리가 불꽃의 가장자리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해, 나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완성된 그림 앞을 떠날 줄 몰랐다.                            -p.83~84-

작업의 과정은 책 속에서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실제로 한은선의 모든 작업은 붓 없이 물방울과 한지, 먹만으로 이루어진다.

화가는 어느 날, 뉴욕에서 섬광을 동반한 낙뢰가 발생하는  순간, 찰나 속의 아름다움  혹은 순수의 근원을 엿본 듯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작품은 이런 강렬한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한지 위에 퍼져나간 물과 먹, 물감이 스며드는 효과를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힘들게 완성한 작업을 통해, 보이는 세계와 이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신비한 침묵을 드러내려 한다.


소설 역시 한강 특유의 무거운 침묵과 어둠이 바탕이 되어 인간 삶의 연약함, 존재의 고통,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인식이 드러난다.

수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바람'은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상징하는 듯하다. 끊임없이 바람은 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존재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들의 이야기. 한강의 짧고 간결한 문장은 균일한 고요 속에서 고독의 감정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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