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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Dec 10. 2019

‘공포, 테러, 혐오의 시대’ 위로한 거장, U2

2019년 12월 8일, U2의 첫 내한 공연 가다.

‘U2 콘서트 보러 가기’. 몇 년 전부터 ‘버킷 리스트 수첩’에 적어놓은 것이었다. 언제 이룰 지는 알 수 없는 꿈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거대했고,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다행히 그 꿈이 이뤄지는 데에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 걸렸다.


 43년 전, 아일랜드 더블린의 10대 청소년들이 결성한 밴드 U2는, 수십 년 동안 대중음악의 최정상을 지켰다. 1억 8천만 장의 앨범을 팔았고, 스물두 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규모와 예술성을 모두 갖춘 U2의 콘서트는 공연의 교본처럼 여겨진다. ‘지구 상 가장 큰 록스타’지만, 유독 한국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멤버 전원이 환갑이 되어서 펼쳐지는 첫 내한이었으나, 그들은 퇴색되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고척 스카이돔에 2만 8천여 명의 관중들이 모인 가운데, 침묵을 깨는 것은 드러머 래리 멀린 주니어의 강력한 연주였다. 뒤를 이어 기타리스트 디 에지(The Edge)가 등장했고, 리더인 보노(Bono)와 베이시스트 애덤 클레이튼(Adam Clayton)이 ‘Sunday Bloody Sunday'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분단된 아일랜드의 비극을 다룬 이 노래의 말미, 보노는 ’No More! No War!'를 외쳤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와 같았다. 그의 포효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분노였다. 'I Will Follow', 'New Year's Day', 그리고 존 레넌에게 헌정된 'Pride'(In The Name Of Love)가 이어졌다. 마틴 루터 킹에게 헌정하는 곡으로 유명한 ’Pride'는 특별히 존 레넌에게 바쳐졌다. 이 날은 존 레넌이 뉴욕에서 숨을 거둔 지 정확히 39년이 되는 해였다.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테러의 시대, 관용을 간직합시다. 공포의 시대, 신의를 간직합시다.

정의, 기쁨, 사랑, 그리고 공동체... 이것이 우리의 공동체죠. 바로 이 밤."


- 보노


이 몇 마디와 함께, 명반 < The Joshua Tree >(1987)를 상징하는 ‘여 호수와 나무’가 화면에 나타났다. 빨간 배경 화면 앞에 네 명이 섰다. 디 에지가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의 쟁글거리는 기타 리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LED 화면에는 거대한 도로가 뻗어 나가는 모습이 펼쳐졌다. '조슈아 트리' 투어의 영적인 서막이었다.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벅찬 경험인가.


 ‘Stand By Me(Ben E King)’와 섞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With Or Without You' 등 시대를 타지 않는 명곡은 모든 관객들을 완벽하게 몰입시켰다. ‘Running To Stand Still'에서 들려준 보노의 하모니카 연주 역시 감성을 자극했다. <The Joshua Tree>에서 U2는 이상향을 향해 달려가는 구도자였다. 그들은 ’ 약속의 땅‘ 미국을 동경하는 아일랜드인이자, 그 치부와 위선을 비판하는 양심의 목소리였다. 'In God's Country'를 부르기 전에도, 보노는 자신은 미국의 팬이자, 동시에 비판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사람들에게 보노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오피니언 리더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사회운동가이기 이전에 보노는 불세출의 록 보컬이며, 최고의 프론트맨이다. 그는 무대의 모든 곳을 활용하며 관객들과 소통했다. 뮤지컬을 하는 듯, 다양한 감정 연기와 몸짓으로 공연의 멋을 끌어올렸다. ‘Mothers Of The Disappeared’를 부를 때는 돌출 무대 위에서 무릎을 꿇다가도, 공연의 2부를 알리는 ‘Elevation'이나 ’Vertigo' 같은 노래를 부를 때는 가장 파워풀한 록스타로 변신했다.  누구도 세월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에게는 놀라운 저력이 있었다. 디 에지의 키보드 연주 위에 목소리를 맡긴 'Every Breaking Wave'에서는 녹슬지 않은 노래 솜씨가 빛났다.


네 명의 '명인'이 보여준 40년의 호흡은 놀라웠다. 딜레이 이펙터를 적극 활용하는 디 에지의 기타는 풍부한 공간감을 만드는 동시에, 찰랑거리는 청량감을 선사했다. 공연 초반, 목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던 보노가 잠시 목을 가다듬을 때, 고음의 코러스로 수 초의 공백을 채워주기도 했다 애덤 클레이튼과 래리 멀렌 주니어의 연주 역시 공연의 중심을 굳건히 잡아 주었다. '가로 61m, 세로 14m 규모의 8K 해상도 LED 스크린이 관객을 압도했다. 거대하면서도 입체적인 영상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곡의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 충실하게 기여했다. 듣는 경험과 보는 경험이 모두 충족되었다.


사랑은 어떤 것보다 더 큰 거야


U2가 유럽에서 이름을 알려가고 있을 때, 보노는 한 평론가에게 ‘나는 그저 로큰롤 가수일 뿐이지만, 이 거대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잘 활용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노의 신념은 공허한 선언이 아니라 이후, 실천적 행보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전 지구적 영향력과 기득권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빈곤국들의 부채를 탕감하자는 운동에 나섰고, 에이즈 퇴치 운동과 페미니즘 지지 선언에 나서기도 했다. < The Joshua Tree >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 것 역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이번 공연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청소년들의 죽음, 아일랜드처럼 남과 북으로 갈려진 한국, 그리고 인권과 평화를 논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단연 ‘Ultraviolet(Light My Way)'을 연주할 때였다. 이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보노는 여성들이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화면에 뜬 ‘HISTORY'라는 글자가 ’HERSTORY'로 바뀌었다. 근대 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러시아의 반정부 밴드 푸시 라이엇부터 사회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 인사들의 모습들이 LED를 가득 채웠다. 지난 10월 세상을 떠난 연예인 설리,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여성주의자 나혜석 화가,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서지현 검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인사들도 등장했다. ‘해녀'의 등장도 인상적이었다. 언제나 있었으나,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존중이 돋보였다.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라는 화면 속 메시지는,  'Love Is Bigger Than Anything In Its Way(사랑은 어떤 것보다 더 큰 거야)로 이어졌다.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도 이 순간이었다. 테러와 공포, 혐오의 시대. U2는 이 시대에 필요한 해답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긴 공연은 또 하나의 송가 ‘One'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LED 속 초대형 태극기를 뒤로 한 채, U2는 후일을 기약했다. (공연 다음날, 김포 공항을 찾아가 U2를 만났다. ‘다시 돌아올 것인가’라는 내 질문에 애덤 클레이튼은 ‘몹시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또 돌아올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실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고척돔의 고질적인 음향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으나, 베테랑 U2의 퍼포먼스는 그 아쉬움을 상쇄했다. 시대에 관한 물음을 멈추지 않았던 전설은, 그 고민을 음악과 공명하도록 했다. 슈퍼스타와 구도자, 영웅과 시민이 공존하는 두 시간이었다. 이 공연은 ‘내가 왜 음악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기도 했다. 음악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과거와 미래를 매개한다. 수십 년 전에 결성된 아일랜드 밴드와, 한국에서 나고 자란 20대 관객들이 ‘우리는 서로 닮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스크린을 채운 여성들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


 보노가 말했던 ‘음악의 힘’은 바로 이런 순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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