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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Sep 08. 2021

'샹치'에 오리엔탈리즘이 묻었나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마블 역사의 또 다른 이정표



피에르 에메릭 오바메양, 폴 포그바, 가엘 몽피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세 사람 모두 < 블랙 팬서 >의 '와칸다 포에버'를 세레머니로 선보인 흑인 스포츠 선수라는 것이다. 이들은 전 세계 흑인 사회에 대한 연대를 표하고자 이 세레머니를 선택했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블랙 팬서>는 흑인 사회에서 히어로 영화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 콘텐츠였다. 늘 주변부에 위치했던 흑인을 중심부에 배치한 아프리칸 히어로의 탄생이었다. 제작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독 라이언 쿠글러를 비롯한 제작진의 90% 이상이 흑인이었다.


지난해 8월 '블랙 팬서' 채드윅 보스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주연 배우 시무 리우는 '당신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블랙 팬서>가 마블이 내놓은 첫 번째 흑인 히어로의 솔로 무비였다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최초의 아시아인 히어로 솔로 무비다. 주연 배우와 감독 모두 아시아계다.


아시아인을 주인공으로 삼고자 한 노력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아시아계 아티스트들이 주축을 이룬 미국의 레이블 '88 RISING'이 OST의 프로듀싱을 맡았고, 한국의 자이언티, 서리, 비비, 일본의 호시노 겐 등 아시아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엔딩곡 'Fire In The Sky'의 주인공 역시 한국계로 유명한 미국 뮤지션 앤더슨 팩(Anderson Paak.)이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에 활력을!



중화권의 무협 영화, 그리고 21세기 최고의 테마 파크가 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서로 단절되어 있을 것만 같은 세계의 중간 지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뼈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숙명적 대립이다.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이 영화가 "자신의 아버지(웬우)가 세계 최고의 범죄자라는 걸 깨닫게 된 청년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케빈 파이기의 설명대로,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블랙위도우>에 이어 마블은 다시 한번 가족주의 영화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새로울 것이 없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스토리에 활력을 부여하는 것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다. '샹치'를 연기한 시무리우와 장멍얼은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한다. 아콰피나 특유의 경쾌한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관록의 배우 양자경 역시 반갑다.


'영화 황제' 양조위의 존재는 주인공을 압도한다. 양조위가 연기한 텐 링즈의 수장 '웬우'는 이 이야기의 구심점이다. 웬 우는 여러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텐 링즈'의 힘을 얻게 된 이후 천 년 동안 세계를 움직인 흑막이지만, 아내와의 사별 이후 과거에 붙잡혀 있는 로맨티시스트이다. 그는 동시에 '가족의 복원'을 끊임없이 꿈꾸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양조위는 이 복잡한 인물의 얼굴을 절륜한 연기로 구현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제작비 1억 5천만 달러의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화양연화>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백 년 치의 이야기를 하는 양조위의 눈빛은 영화의 격을 반절 이상 끌어 올리는 힘이다.


웬우는 자신의 조직에 여성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가부장적 존재지만, 그의 존재는 딸인 샤링(장멍얼 분)로 하여금 "아버지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없다면 내 제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가부장 중심의 이야기에 페미니즘적인 시각도 곁들여져 새롭다.


서구권의 오만과 무지 비틀다



이 영화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기반했다고 지적하는 여론이 있다. 물론 샹치의 캐릭터는 탄생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쿵푸의 달인'이라 불리는 샹치는 이소룡 열풍에 힘입어 탄생한 마블 코믹스 캐릭터다. 원작에서 샹치의 아버지는 '푸 만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푸 만추는 영국의 작가 색스 로머가 만든 캐릭터로, 긴 수염을 늘어뜨린 채 청나라식 옷을 입고 세계 정복을 꿈꾸는 전형적인 악당이다. 서구권이 동양을 바라보는 관점 중 '신비한 공포의 존재'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웬우는 세련된 현대 복식을 하고 있다. 영화화된 <샹치>는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작품에 가깝다. 미국과 가짜에 의해 '만다린'으로 불렸던 웬우는 그 별명을 비웃는다. 샹치는 어린 시절 자신을 두고 미국인들이 자신을 보고 '강남 스타일'을 부르자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고 받아쳤다고 말한다. 동양인은 모두 같은 문화권에서 온 동질적 집단이라 생각하는 서구권의 오만과 무지를 비튼 것이다.


<샹치>는 동양에 대한 몰이해나 막연한 신비화가 아닌, 존경심과 이해에 기반한 결과물로 만들어졌다. 액션부터 그렇다. 극 초반 웬우와 장리(진법랍 분)가 펼치는 우아한 액션의 합은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소환한다. 버스와 고층 빌딩 등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한 액션은 성룡의 그것이다. 외딴 세상 '탈로'에 등장하는 구미호, 주작 등의 동물들 역시 신화 속의 외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벤 킹슬리와 호흡을 빚는 기묘한 동물 '모리스' 역시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제강'의 모습을 재현한 것. 할리우드 영화가 아시아인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철 지난 '브릿지' 염색도 없고, 과장된 시선과 스테레오타이핑도 없다. 중화 사상 역시 기우다. 오히려 케이티(아콰 피나) 분과 같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한계는 있다. 웬우의 존재감이 빛나는 사이 정작 주인공 샹치의 서사가 부족했다는 것, 그리고 인물들의 존재감이 애매해지는 최 후반부의 전개를 뽑을 수 있다. 그럼에도 <샹치>는 새로운 히어로의 출발으로선 충분한 성취다. 세상의 변화에 영민하게 대답해 온 마블 스튜디오는 다시 한번 세계관을 흥미롭게 확장하고 있다. 이번에도 '할 말이 많아지는' 히어로 영화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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