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네마와 테마 파크 사이에서 표류한 마블
클로이 자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영화 감독이다. 테렌스 맬릭의 세례를 받은 그는 꾸밈없는 자연광이 비추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작은 인간의 모습을 차분하게 관조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던 <노 매드랜드>(2021), 그리고 <로데오 카우보이>(2017)는 클로이 자오의 영화 세계를 응축한 자기소개서였다. 누군가는 그의 작법에 찬사를 보내고, 반대편의 누군가는 '지루한 영화제용 영화'라고 할 것이다.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2019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마블스튜디오의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 테마파크'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늘 소규모의 작가주의 영화를 빚어 온 클로이 자오가 21세기 최대의 '테마 파크'를 만나게 되었다. <노 매드랜드>는 제작비 500만 달러의 저예산 영화였으나, 그가 연출한 신작 <이터널스>는 2억 달러가 투입된 초대형 블록버스터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다.
자연광이 비추는 불멸자들의 이야기
뚜껑을 열어본 <이터널스>의 스케일은 실로 거대하다. '인피니티 사가'를 지휘한 악역 타노스는 1천 년을 살았다. 그러나 이터널스들은 7천 년 전 지구에 왔다. 마블의 영화가 지금까지 이만큼의 시간을 다룬 적은 없었다. '셀레스티얼'이라는 우주적 존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처음이다.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MCU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페이즈 4'의 실질적인 시발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블 스튜디오의 케빈 파이기 사장은 클로이 자오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클로이 자오가 자신의 개성을 블록버스터에 녹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자연광을 활용한 영상미, 광각 렌즈를 통해 표현된 아름다움은 이터널스의 강점이다. 클로이 자오는 <노 매드랜드>를 촬영할 때와 동일한 방식의 카메라 워킹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차분하게 다운된 영상의 톤 역시 지금까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본 적 없는 것이다.
한편 클로이 자오는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성의 가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백인 남성 중심의 이야기였던 마블은 이제 성소수자 흑인, 정신질환자, 장애인, 그리고 어린이의 몫으로 뻗어 나갔다. 마카리를 연기한 배우 로던 리들로프는 극 중 역할과 마찬가지로 실제 청각장애인이다. 'PC(정치적 올바름)가 묻었다'는 불평은 중요하지 않다.
문명사 관통하는 서사시, 그러나 아쉬움 남는 이유는
그러나 <이터널스>는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이터널스>는 텐트폴 상업 영화이며, 슈퍼 히어로 영화다. 그러나 정작 액션이 만드는 쾌감이 부족하다. 압도적인 속도를 자랑하는 마카리가 인상적인 순간을 몇 번 만든 정도다. 최근 개봉작인 <블랙 위도우> <샹치와 텐링즈의 전설>과 비교해도 그렇다. 특히 길가메시를 연기한 마동석의 활용법이 불만족스럽다. <범죄도시>와 <부산행> 등 그의 대표작들을 참고한 흔적이 느껴지지만, 마동석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타격감을 극대화하는데에는 실패했다.
클로이 자오는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감독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많은 것을 155분 안에 눌러 담고자 했다. 그는 유사 가족인 이터널스의 분열과 재결합, 세르시(젬마 찬 분)와 이카리스(리차드 매든 분)의 로맨스, 그리고 자유 의지, 인간다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공존시키고자 했다.
자오의 야심과 별개로, <이터널스>는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히어로의 솔로 영화를 충분히 만들어 놓지 않은 채 등장한 팀업 무비 <저스티스 리그>의 방황이 떠오르기도 한다. 열 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교차 편집을 통해 이들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과정이 길어지는데, 관객의 입장에서는 지루함을 느끼기도 쉽다. 이터널스의 적대 세력인 '데비안츠' 역시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소모적으로 휘발되고 만다.
거대한 이야기의 서막 될까?
<이터널스>의 설정과 배경은 매력적이다. <이터널스>는 지적 생명체를 잡아먹는 '데비안츠'에 맞서기 위해, '우주적 존재'인 셀레스티얼이 지구로 파견한 존재다. 테나(안젤리나 졸리 분), 파스토스(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분) 등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모티브를 얻어 탄생했다. 길가메시는 수메르 신화 속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신화에 기반한 캐릭터답게 이터널스는 필멸자인 인간과 부대낀 채 수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신화적 존재다.
메소포타미아와 아즈텍, 바빌론. 그들은 인류가 발전하는 역사적 순간마다 디딤돌을 놔 주었고, 인류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은 채 관조했다. 동시에 인간처럼 울고 웃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인류의 문명사를 훑으면서 이 특별한 운명을 이야기할 것이라면, 이 영화는 몇 개로 나누어져 제작될 필요가 있었다. (한편 히로시마 원폭이 등장하는 장면은 불쾌하지 않았다. 일본을 피해자로 연출한다기보다는, 인간에게 기술을 가져다 준 신의 거시적 시선을 서술한 것에 가깝다. 기술이 인간을 파멸시킬 것이라 고민했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케빈 파이기는 <이터널스>를 두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재정립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이터널스>는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이터널스>의 '신선 지수'는 50점대까지 떨어졌다. 최근 개봉된 마블 영화 중 가장 낮은 점수다.
클로이 자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세계를 그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거대한 세계 속에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개인, 그리고 그 심연 속의 우주를 그리는 일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클로이 자오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이 영화를 최악의 마블 영화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네마와 테마파크의 합일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터널스>는 찬란하게 빛났다가, 표류하기를 반복하는 미완의 문제작이다. 마지막 예고대로 이들이 돌아오게 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지켜보자.
- 이현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omn.kr/1vv8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