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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Oct 23. 2021

낯선 숲에서 낯익은 친구를 만났다.

[리뷰] 셀린 시아마의 새로운 역작, <쁘띠 마망>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을 하고 동네에서 놀이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아도 그랬다. 나,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책임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나’와 어린 시절의 부모가 만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해봄직한 상상이었다. 그래서 이 판타지는 애니메이션이나 SF 영화에선 제법 다뤄진 주제였다. 도라에몽에도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걸작 < 백 투 더 퓨쳐 >가 그랬고, 최근에는 호소다 마모루의 < 미래의 미라이 >(2018)가 있었다. 제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셀린 시아마의 < 쁘띠 마망 > 역시 대열에 합류했다.


엄마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여덟살 여자 아이 넬리(조세핀 산즈 분)는 어머니 마리옹과 함께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외할머니의 옛 집으로 향한다. 마음을 추스리기 힘들었던 마리옹은 먼저 그곳을 떠난다. 넬리는 홀로 주변 숲에서 놀다가 자신을 닮은 또래 아이 마리옹(가브리엘 산즈)을 만나게 된다. 눈치가 빠른 넬리는 그 친구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시 친구를 만나러 숲속으로 향한다. 초대를 받은 곳에서는 젊은 시절의 외할머니 역시 만날 수 있었다.


주된 설정만 놓고 보면 이 이야기는 판타지 그 자체다. 셀린 시아마가 이런 소재를 다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에서 진가를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데뷔작인 < 워터 릴리스 >와 < 톰보이 >, < 걸후드 >로 이어지는 성장 3부작, 그리고 지난해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킨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까지. 그가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현실의 불완전에 기반한 것이었다.


쌍둥이 자매가 각각 어머니와 딸의 어린 날을 연기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 쁘띠 마망>은 서로 많이 닮아있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인 동시에, 같은 눈높이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의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선에서 만난 둘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성숙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인만큼, 영화는 ‘모성애의 위대함’을 굳이 웅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더 크게 자극한다. 엄마에게도 나와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라.


시공간을 뛰어넘는 셀린 시아마의 세계


영화의 유일한 남성은 넬리의 아버지(스테판 바루펜 분)다. 그는 딸의 바람대로 오랫동안 길러온 수염을 깎을만큼 자상한 사람이지만, 정작 아내가 어린 시절 지은 오두막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 한다. 오두막을 기억하고, 오두막을 짓는 것은 모두 여성이다. 영화는 남성을 철저히 서사의 주변부에 놓고 있다. 셀린 시아마는 언제나 자신의 영화가 페미니즘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남성의 존재를 소거함으로서, 여성들이 브르타뉴에서 잠시나마 누리던 유토피아를 완성했다. 이번에도 그는 동일한 선택을 했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 세계는 크게 소녀의 성장, 그리고 여성 연대 등으로 요약되었다. <쁘띠 마망>은 여기서 더 나아가, 두 키워드를 유연하게 재조합하고 변주한다. 이 영화 속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삶과 죽음이 동일한 시간대에 모두 존재하고 있다. 할머니를 잃은 손녀가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고, 나를 낳기 전의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시아마는 이렇다 할 특수효과나 소품의 변화 없이도 자연스럽게 시공간의 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감정을 관객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영화 내내 음악의 활용을 최소화했다가, 가장 적절한 시점에 음악이 울려퍼지는 전작의 미덕도 그대로 살렸다. 특히 시아마가 직접 노랫말을 쓴 테마곡은 영화의 메시지에 힘을 싣는다. 프랑스의 전자음악가 파라 원(Para One)의 감정을 고취시키는 편곡도 좋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새로운 꿈을 노래하리라 너와 함께 아이가 되는 꿈 결국 너와 멀어지는 꿈 너와 멀리 아이가 되는 꿈 결국 너와 함께 하는 꿈/ 그 노래는 두려움 없이 마음속 이야기를 하리라 / 내 마음 안에 네 마음이, 네 마음 안에 내 마음이“


- ‘la musique du futur - mon coeur(미래의 음악) 중 -


여성 서사라는 기존의 구심점을 유지하면서, 셀린 시아마는 이야기의 폭과 형식을 확장켰다. 무려 3세대를 잇는 여성 서사는  또다시 수많은 가족과 딸, 어머니의 것이 된다.  넬리와 마리옹은 시공간을 초월해 소통한다.


두 아이는 부모와 자녀라는 위계적 관계를 거세했기에, 더욱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보다 예전부터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부모와 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 쁘띠 마망 >은 순수한 아이들의 눈으로, 죽음과 상실, 그리고 어른의 아픔을 위로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우아함에 비해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전혀 다른 층위의 여운을 남기는 70분이다. 셀린 시아마를 동세대 최고의 감독이라 예찬하는 것도 호들갑이 아니다. 너무 좋은 영화를 만든 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이현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다. http://omn.kr/1vo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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