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의 여섯번째 앨범 'End Theory'를 듣고
얼마전 MBC '놀면 뭐하니+'에 윤하가 출연했다. 싸이월드 시대를 추억하는 '도토리 페스티벌'에 섭외하기 위해 윤하를 찾아간 것이다. '기다리다', '오늘 헤어졌어요', 에픽하이와 함께 부른 '우산' 등 추억의 선율들이 울려 퍼졌다. '또 추억의 노래인가' 라며 식상해 하는 시청자들도 많아지고 있지만, 추억 앞에서는 비무장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 한 노래도 추억 속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윤하의 오랜 팬이다. 나의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것은 곧 윤하의 노래를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열 다섯 살이었던 2007년, 스무 살의 윤하가 무대에서 '비밀번호 486'을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귀여운 외모, 작은 체구에서 발산하는 카리스마, 당차고 시원한 노래,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의 길을 뚫었다는 서사에 반했다. 열 다섯 중학생은 윤하의 모든 행보에 신경을 집중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그가 출연한 방송 영상을 전자사전으로 소장했고, 세뱃돈과 문화상품권을 모아 앨범을 샀다. 친구와 함께 간 첫 단독 콘서트에서 시원한 록 넘버 'Delete'를 첫 곡으로 들었던 순간의 공기는 잊을 수 없다. 전 소속사와의 오랜 분쟁을 마친 윤하가 신곡 'Run'을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선공개하던 날, 용기를 충전했던 재수생의 기억도 선명하다. 윤하는 내가 첫번째로 인지한 동세대의 가수다.
지난 11월 16일, 윤하가 정규 6집 < End Theory >를 발표했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는 것은 2017년 < Rescue > 이후 4년 만이다. 앨범의 시작부터 도전적이다. 'P.R.R.W'가 화려하게 문을 연다. 록과 퓨처 베이스가 어우러진 광활한 사운드는 우주를 청각화한 야망을 뒷받침한다. '나에게는 계획이 있다'가 자연스럽게 그 바톤을 이어간다.
"두 눈앞의 끝 사뿐 넘어가 한계 밖의 trip, 짜릿하잖아
녹이 슨 심장에 쉼 없이 피는 꿈 무모 하대도 믿어 난"
- '오르트 구름' 중
스웨덴의 디제이 고(故) 아비치(Aviciii)를 떠올리게 만드는 컨트리송 '오르트 구름'에서는 빠른 기타 리프 위에서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보컬이 폭발한다. '혜성'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긍정적인 분위기로 직진한다('오르트 구름'은 실제로 '오르트 구름 가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이다. 오르트 구름은 혜성의 진원지로 알려진 태양계의 구름층이다). '물의 여행'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신시사이저 사운드와 함께 어우러지며 절창을 뽐낸 윤하는 앨범 중반부터 분위기를 전환한다.
14년 전 '나는 어떤 모습이 될까'(앨리스)라고 노래했던 가수가, 이제는 '마음에 마음을 가누려 애를 쓰던 아이를 안아줄 어른이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워'(잘 지내)'라고 노래한다. 미래의 자신을 더듬어보던 스무 살 소녀가 이제는 다른 아이들을 쓰다듬는 어른이 되었다. 'Truly'에서는 유약한 자신을 고백하며, 직접 작사한 대곡 '별의 조각'에서는 거시적인 시선에서 삶을 바라본다. 실패와 좌절로 가득한 삶이었지만, 자신을 우주의 일부분으로 정의하고, 그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자 한다.
"내 마지막 숨을 지켜줄 사람 있을까 아직도 어딘가 난 꿈을 꾸게 돼
갈팡질팡 하는 날 안아줄 수 있을까 말이 좀 안되지만"
- 'Truly' 중
팝의 전설 프린스(Prince)는 사망하기 1년 전, 2015 그래미 어워드에 등장해 "앨범은 중요하다. 책처럼, 흑인의 삶처럼"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플레이리스트와 랜덤 재생의 시대에도 공들여 짜인 앨범의 자리는 필요할 것이다.
윤하는 새 앨범 제작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동시에 수록곡의 연계를 하루의 흐름과 나란히 두고자 고민했다. 그 결과, 이 앨범에는 우주로 뻗어 나가는 서사,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함께 담겼다. 록,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신스팝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면서, 보컬리스트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 역시 극대화했다. 윤하의 < End Theory >는 앨범에 대한 낭만을 가장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우리는 함께 나이 들어갔다. 윤하가 부른 '스물 두번째 길'을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던 고등학생은 곧 서른이 된다. 윤하도 데뷔 20년 차를 바라보는 30대 베테랑이 되었다. 나는 예전처럼 한 뮤지션의 '덕질'에 집중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렇게 사랑하던 윤하의 새로운 노래가 나와도 시큰둥해졌다. 새 앨범이 나오면 의무적으로 듣고, 남아있는 티켓이 있을 때 콘서트에 간다. 그렇게 나는 점점 라이트한 팬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음악과 목소리의 힘이었다. < End Theory >는 윤하의 음악에 순수하게 열광하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동시에 그는 추억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별의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감사하게도, 나의 아이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