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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진 May 04. 2023

우정

 "종진아, 나 결혼한다."


 친구 R은 어느 늦은 밤 전화로 그렇게 소식을 전해왔다. 나보다 늦게 결혼할 것처럼 평소에 이야기했었는데, 뒤통수를 맞아버린 것이다. 너도 가는구나. 주변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몇 남지 않았기에 왠지 느껴야만 할 것 같은 의무적 위기감이 들었다. 결혼 축하한다고,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라고, 으레 할만한 축언을 건네며 전화를 끊었다.


 R은 내 고등학교 동창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며 왕래가 줄었으나,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이따금씩 만나는 걸 보면 꽤 가까운 사이임에 틀림없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삭은 얼굴뿐인데 이 녀석이 어느덧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된다니. 푸흐흡. 실소가 새어나왔다. 세월 참 빠르네. R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함께 했던 학창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인간은 추억을 먹으며 사는 법이다. 이유 모를 따뜻함이 가슴 한켠에서 피어올랐다. 친구들이 없었으면 과연 무슨 낙으로 학창시절을 보냈을까. 당시의 내가 무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준 그들에게 더없는 감사를 느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우정을 각별히 소중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친구 관계를 통해 느끼게 되는 본질적인, 어떤 그 끈끈한 감정보다는 그러한 관계를 통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들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학부시절 공강시간에 심심치 않게 같이 식사할 사람이 필요했고, 시험기간에 필기노트를 공유하며 함께 공부할 사람이 필요했으며, 여럿이 필요한 동아리 활동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이겠으나 애시당초 그 크기가 매우 작았고, 지금은 희미해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지 않음을 재확인하게 될 때면 스스로가 낯설어진다. 내가 이렇게 정없고 냉정한 인간이었나?


 솔직히 아직까지도 우정이란 어떤 감정인지 표현하기가 어렵다. 흔히들 말하는 '결이 비슷한 사람, 잘 맞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또한, 믿어야 한다는 당위와 믿을 수 없음이라는 감정 사이에서 찢겨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부터 치유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리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언젠가 누군가와 깊게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꿈꾼다. 우정이 소중한 적 없었기에 소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곧 가장이 될 R의 행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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