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매우 뜨겁던 일요일 오전이었다. 아이들과 킥보드를 타러 집 근처 공원 겸 놀이터로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놀이터의 한 쪽이 공사중이어서 아이들이 킥보드를 탈 수가 없었다. 이 더운 날 킥보드 타는 폼이 어설픈 둘째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대신 놀이기구를 타기 시작해 땡볕에 정수리를 내어줬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아니 오전인데도 이렇게 뜨겁고 더우면, 오후엔 어쩌라는 건가. 놀이터 반대편에선 바닥분수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우연히 그 곳을 발견했을 뿐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 곳을 지나치길 바랐다. 여벌 옷도 없고, 수건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은 더위에 얼굴이 벌겋게 탄 아이들이 안쓰러웠는지 물놀이를 하러 가자고 했다. 조금만 젖으면 괜찮다던 남편의 말에 "그래, 가자!"하고 바닥분수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조금만 젖을 리가 없다. 물 만난 물고기들이었다. 아이들은 이 곳이 내 세상인 물고기들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쫄딱 젖었다. 젖은 옷의 물을 쭉쭉 짜내고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목욕을 시켰다. 그러고 나서 난 또 집 밖으로 나섰다.
빌릴 책이 있어 도서관을 갔다. 원래는 아이들과 함께 가서 책도 보려고 했지만, 물놀이의 여파로 나만 후딱 다녀오기로 했다. 희한하게 덥고 뜨거운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옆에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가. 나 혼자라 그런가. 여유롭게 다녀오라던 남편의 말에도 빌려야할 책만 빠르게 찾아 대출하고는 집으로 갔다. 여유롭게 다녀오라는 말이 전혀 여유롭지 않게 들렸나보다. 집 가는 길에 과일과 채소를 파는 가게가 있다. 그 가게를 보니 '집에 과일이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 냉장고에는 오렌지랑 사과밖에 없었다. 시원하게 수박을 먹으며 티비를 보는 아이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8천 원, 만 원, 만 2천 원 ... 다양한 가격대의 수박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12,000 원이라고 써있는 수박들만 눈에 들어왔다. 자기들을 데려가 달라고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건지. 가게 사장님께 좋은 수박으로 골라달라고 했다. 몇 가지 골라주셨고, 그중 색이 가장 예쁜 아이를 골랐다. 책도 가득이고, 자두도 한 바구니 사서 무거울 법했는데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그저 햇볕에 그을리고 있는 팔이 따갑기만 했다. 집에 수박을 들고 들어가자 아이들이 좋아하며 방방 뛰었다. "아빠, 엄마가 수박을 데려왔어요!"라는 둘째를 보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차갑게 먹으려 수박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남편이 수박을 잘라준단다. 그 말이 무섭게 나를 부르는 남편.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얼은 건가? 상한 거 같은데? 너무 익은 거 아냐?"
수박 한 가운데가 젤리처럼 보였다. 나는 그와중에 "꿀수박 아니야? 꿀수박이 이렇게 생겼던데. 얼었다 녹은 거면 가장자리부터 얼겠지."라고 했다. 남편은 "아, 그런가?"하며 수박을 계속 잘랐다. 지금 생각하면 덤 앤 더머도 이런 덤 앤 더머가 없다. 남편이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다길래 내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질겅'
먹을 수가 없는 식감과 맛이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반쪽과 자른 수박을 봉투에 담아 고이 안아들고 다시 과일 가게로 갔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이. 하필 왜 내 수박이. 이 더운 날 다시 그 곳에 가야 하다니. 멀지는 않아도 한 발짝만 나가도 뜨거운 오늘! 그리고 난 컴플레인을 거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란 말이다. 가는 길 내내 어떤 말을 해야할까 생각했다. '사장님이 바꿔주실까?, 환불해주실까?, 되려 화를 내시면 어떡하지?' 별의 별 생각을 다했다. 2천 원이었으면 그냥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을 텐데, 만 2천 원은 큰 돈이니까 갔다. 가게 앞에 도착했다. 사장님의 실루엣이 보이자 긴장이 되었다. 쟤는 뭐지?싶은 눈초리였다.
"사장님... 이거 못 먹어요..."
사장님은 수박을 보자마자 "농익었네. 얼마짜리였지? 바꿔가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수박을 통통 두드리며 좋은 수박을 골라주셨다. 걱정이 무색하게 빠르게 일처리가 끝났다. 다시 들고 가는 수박은 왜이렇게 무겁던지. 아까는 책 다섯 권에, 자두에, 수박을 들어도 하나도 무겁지가 않았는데, 지금은 수박 한 통 들고 가는데 너무 무거웠다. 내 마음의 무게인가. 사장님도 수박을 열어서 가져오시는 것도 아니고, 파는 것도 아니시니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 역시 수박 속이 어떤지 알고 가져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뜨거운 여름에 수박도 뜨거웠나보다. 속이 타들어가도록 익어버렸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농익은 수박을 마주하는 날. 그 수박을 바꾸러 가는 용감한 나를 마주하는 날. "왜 하필 나야!"하며 운을 탓하는 그런 날.
운으로 탓을 돌릴 수 있다는 건 어쩜,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