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자리를 참 잘 고르셨다’
받침소리가 없어 아마 미국인들도 상대적으로 발음하기 쉬울 단어를 제목으로 한 영화, 미나리를 관람했다. 국제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으며 침울하고 우울한 이 전염병 시대에 계속해서 반가운 수상 및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런 작품이다. 그것만으로도 삶의 활력소 같은 이 영화의 발견은 아마 쉬운 발음 때문만은 아닐 테다. 직접 스크린에서 확인한 미나리의 가치는 역시, 결코 발음 때문이 아니다.
그 당시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가족들의 모습이 모두 이들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분명 이런 모습을 한 가족들 역시 손가락만으로 세기에는 부족할 만큼 많았을 것이다. 한국 가족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지내며 느끼는 문화적인 충돌과 가치관의 괴리감, 즉 외부의 요소들 보다도 가족이라는 집단안에서 구성원 개개인이 지닌 생각과 책임감으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의 모습들을 줌인하여 다루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미나리를 비롯한 식물, 어디 식물뿐이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에게 물은 모두가 알고 있듯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 아무데서나 뿌리내리고 잘 자란다고 알고 있는 미나리 역시 물이 가까이에 있어야 비로소 제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 가족이 생활에 사용해야 할 물까지 본인의 농사에 끌어서 써야만 했던 아버지이자 남편, 누군가의 사위인 제이콥에게 많은 감정이입이 된다. 그도 남들처럼 잘할 수 있다고 믿었고, 분명 잘하고 싶었을 것이다. 떳떳하지 못한 남편, 자랑스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수컷의 말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팔도 들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면이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쿠키도 구울 줄 모르는 ‘그랜마’ 를 비로소 할머니로 받아들이면서 데이빗은 성장한다. 과연 부모의 품 안에서만 자란 아이들이 조부모의 사랑까지 받은 아이들보다 더 빨리 뜀박질을 뗄 수 있을까. 여러 부류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극 중 이 가족들의 집은 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간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씻겨주기도 하며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며 하루하루 그들만의 뿌리를 내려간다. 어디서든 알아서 잘 자란다는 미나리, 순자라는 인물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 주제의식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느껴지는 갈증과 오로지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갈증이 있다. 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매서운 불길 같은 고난과 역경에도, 미래라고는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가장 가까운 곳에 샘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 이름은
역시 가족이고, 앞으로도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