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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우 Jan 07. 2024

아무튼,혼술: 꼬치구이와 자기 결정권

해방촌 혼고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조금 정신이 혼미하다. 오늘의  혼술 목적지는 해방촌. 이곳 주변이야 많이 다니는 곳이지만 그 '해방촌' 안으로 들어와 보기는 그야말로 오늘이 처음이다. 예전에(벌써 오래전이다) 해방촌이 매우 핫했던지라 여기저기서 보고 들어서 꽤나 궁금해했었다. 오늘 가려던 곳의 오픈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서 산책하며 핫플 구경의 기쁨을 누리고자 했으나 생각만큼 핫한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름 트렌디한 아저씨라 자부했었는데, 오늘 걸어 본 해방촌은 특히 신흥시장은 '나 이제 늙었나 봐'를 되뇌게 했다. 왜 좋은 걸 모르겠지? 어느 포인트에서 '좋다'라고 느껴야 하는 거지? 시작도 하기 전에 다운되는 기분이란.


  5시 59분 입장.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로는 5시 오픈이었지만 올봄부터 6시로 변경된 듯하다. 나로서는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일찍 만나고 싶은데.

1등으로 들어와서 바 끝에 앉는다. 바자리가 꽤 여러 개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간판 보고서 배려가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혼술 환영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혼고'라고 쓰여있는 간판이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혼자 먹는 고기라니 얼마나 신박한 것인가. 


 메뉴판을 펴고 골라본다. 이름답게 고기류가 잘 정리돼 있다. 게다가 '1인 세트'가 존재한다니. 이 집 이름이 무색치 않은 순간이다.  고깃집에 왔으니 오늘도 과소비 모드로.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라며 오늘도 위로해 본다. 살치살과 모둠 꼬치를 주문.


  생각지 못한 부분은 '라디오'가 나오고 있다는 것.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무지 생소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술집을 다니면서 라디오가 나온 적이 있었던가. 흠. 흥미로운 일이다. 손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일하고 있는 사장님을 위한 것인가.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얼마 만에 듣는 라디오인가. 반가운 느낌마저 든다. 혹시 이것도 손님에게 이런 생경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려는 주인장의 배려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사이마다 고기는 살살 익어가고 있다. 고기는 뭘 찍어 먹나 했는데. 이미 마리네이드 돼 있는 것 같다. 


  드디어 살짝 들어 먹어본다. 역시는 역시고, 소고기는 소고기다. '츄룹'하고 주스를 마시듯이 육즙을 넘긴다. 육즙이 다 사라지기 전에 한라산을 입안에 첨가한다. 순식간에 꿀 조합이 탄생한다. 오늘은 벌써 성공이다. 아직 대기 중인 꼬치가 더 기대된다. 가지런히 놓인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마음 부자가 된다. 


  사장님이 오며 가며 구워주시니 편하게 먹는다. 사람 없는 시간에 일찍 온 보너스다. '일찍 가면 줄 안 서도 된다'가 한동안 내가 애정하는 문구가 된 것처럼. 미리 준비하고, 일찍 하고, 먼저 행동하면 의도치 않은 부수적인 메리트가 항상 존재한다. 크든 작든. 미리 공부해서 미래를 대비하고, 일찍 시작하여 시간을 절약하고, 먼저 행동하여 기회를 선점한다, 라며 오늘도 조금은,  지금 이 순간과 안 어울리는 생각과 함께 관자를 집어 든다.


  오늘은 돈 쓴 보람이 있다. 관자라니. 지금 갑오징어도 올렸다. 내가 좋아하는 대표 선수들이다. 메뉴가 호감도를 급격히 끌어올린다. 아, 오늘은 술과 안주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의식적으로 체크를 한다. 고기를 먹는 식당에서는 술이나 안주가 남으면 더 시키기 애매해서 그냥 나오는데, 여기 혼고에서는 술과 안주 둘 중에 하나가 남으면 언제나 '여기요~'를 외치고 추가할 수 있다. 술과 고기의 발란스를 언제고 맞출 수 있다. 내일도 5시에 일어나는 관계로 조심조심 체크한다. 술은 반 좀 넘게 남았다. 안심. 


나의 경우는 생활이 좀 풀어진다, 해이해진다,라는 생각이 들면 5시에 일어나서 일상을 타이트하게 조정하는 시즌을 갖는데 요새가 그런 때이다. 머릿속에는 생각이 많은데 몸과 손은 움직이지 않아서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못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5시에 일어나서 확보된 시간으로 뭐라도 하려는 그런 시즌이다. 그래서 5시 일어나고 있는데 이럴 때 술이 마시고 싶어지면 뭐, 어쩔 수 없다. 상황에 맞춰 먹고 마시는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화로 위에서는 버섯이 잘 익어가고 있다.  주방에서 초벌로 구워 나온 이 버섯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재료가 구워지는 틈을 촘촘히 메꿔준다. 그래도 기다리기는 힘들다. 약한 불이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게 만든다. 이건 뭔가.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첫사랑의 설렘도 아니고. 고기는 사랑이라 누군가 말했으니, 이해해 본다.


  라디오에선 다시 광고가 흘러나온다. 요새같이 리모컨이 널려있고 순식간의 터치로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는 세상에 그냥 흘러나오는 광고를 듣고 있으려니 색다른 느낌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새롭고 좋다. 그냥 흘러온 대로 듣고 그대로 흘려보는 것도.

.

  꼬치를 직접 구워 먹는 것도 참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집집마다 구워 주는 정도가 달라 만족하기 어려운데, 각 재료별로 내 입맛에 맞게 익힘 정도를 결정한다는 게 큰 메리트이다. 결정권을 내가 갖는다는 건 엄청난 특권이다. 우리 인생이 항상 자기 손에만 달려 있지 않는 것처럼. 자기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작은 것에도 자기 결정권 갖기. 매우 좋은 느낌이다.


  생각보다 오버해서 2시간을 넘게 있었다. 이 정도 가게라면 3시간이 적정량이지만 나름 '절제'를 위해 여기서 살짝 접습니다. 5시 기상의 미라클 모닝도 소중하니까요.

  

기분 좋게 발길을 돌립니다. 아직 버스냐 택시냐의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오픈 주방에서 꼬치며 재료 소질이며 열심히 하시는 사장님들을 보며 기분 좋게 일어납니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오래오래 이 자리를 지켜주세요. 날 더워지기 전에 또 오고 싶습니다.

그 사이에 라디오는 멈췄네요. 



 이 글을 써놓고 3년이 지나서 다시 해방촌의 '혼고'를 찾았다. 3년 전에 나오면서 오래오래 자리를 지켜달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오픈런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웨이팅이 길어서 이제는 혼술 하기에는 좀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지난 몇 년의 세월을 잘 버텨낸 이 술집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이제는 낮술도 가능하면 어떨까요,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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