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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Jun 25. 2018

한때 소중했던 것들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멀리 떠나가기에...


학창 시절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병원은 지상에서 가장 엄숙한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나는 낯선 이들의 사연을 접하며 미처 몰랐던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고 종종 삶을 돌아보곤 했다.


한번은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한 어르신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다. 거듭된 항암 치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던 할아버지는 의료진과 간병인에게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했다. 눈가에는 늘 핏빛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 앞에서만큼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딸이 다녀간 어느 날, 병실에 있던 누군가 물었다. "왜 딸한테는 아프다는 얘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세요. 창피해서 그러세요, 어르신? "


할아버지는 눈물을 억누르면서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자꾸 아프다고 하면 안 좋은 기억만 안겨줄 것 같아서 이 악물고 참는 거야. 좋은 모습은 못 보여주더라도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갈 순 없잖아......"


할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이 어느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가며 눈꺼풀 속에 눈물을 담아두었다. 마음 한편에 등불이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르신은 극심한 통증으로 정신이 흐려질 만도 하건만, 자식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딸이 겪게 될 슬픔의 무게와 크기를 줄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이 아닌 자식의 삶을 걱정하면서 차분히 이별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



지난해 부산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세월을 알아가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때 내 일부였기 때문이며, 나는 한때 그 사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머물다가 자취를 감추는 것들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 속으로 멀어지면서 무언가를 휙 던져주고 떠나간다. 그러면 마음에 혹 하나가 돋아난다. 세월이라는 칼날로도 잘라낼 수 없는 견고한 상처의 덩어리가 솟아난다.


이별의 대상은 한때 내 일부였으므로 내게서 무언가를 도려내 달아나기도 한다. 그러면 가슴에 구멍이 뚫린다.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허공이 만들어진다.


파주출판도시, 지지향(종이의 고향)에서. 늘 그러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아득한 곳으로 떠나곤 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겨우 깨닫는다.

시작되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들과

내 곁을 맴돌다 사라진 사람들이

실은 여전히 내 삶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날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무릇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먼 곳으로 떠나간다. 그러므로 서로가 세월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전에, 모든 추억이 까마득해지기 전에 우린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부단히 읽고 헤아려야 한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하다.


우린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 중에서



이기주 작가입니다. 마음을 다 쏟아 신간을 준비했습니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이란 제목입니다. 누군가는 이 책 속에 잠시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면서 입으로 발음만 해도 가슴을 환하게 해주던 사람과 일상들을 되짚어 봤으면 해요. 흐릿해진 과거에 마음을 남겨두고 도망쳐 온 경우라면,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추억이 까마득해지기 전에 말입니다.

한때 소중했던 대상이 기억에서 건져 올려지는 순간, 어쩌면 이런 얘기를 들려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우린 그저 우리, 라는 증상을 앓았을 뿐이며, 서로의 존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실은, 책을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는 날도 많았어요. 그럴 때일수록 고개를 쳐들어 독자라는 달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제 문장을 읽고 음미해주시는 분들이 건네주신 빛을 따라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있었고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곁을 내어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마음속의 옛것을 잠시 끄집어낸 6월의 어느 날, 이기주 드림.


가끔 생각합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꽃이 영원히 피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참, 당신에게, 한때 소중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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