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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Jul 13. 2018

그리움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영화 <파이란> 그리고 그리워하는 감정에 대하여

술과 담배에 절어 있을 법한 추레한 건달이 바닷가를 서성인다. 잠시 뒤 건달의 어깻죽지가 격하게 흔들린다. 그의 눈물이 부둣가를 적신다. 온몸으로 오열하며 새벽 바다를 처절한 울음소리로 채우는 남자의 이름은 강재(최민식). 강재의 손에는 죽은 아내의 편지가 들려 있다. 그런데 그는 아내를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영화 <파이란>의 주인공 강재는 깡패다. 다만 깡패라고 하기엔 주먹이 너무 약하고 마음은 더 약하다. 비슷한 시기에 어둠의 세계로 뛰어든 동기 건달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지만, 강재는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새까만 후배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영화 파이란(출처: movie.daum.net)


물론 강재도 인생의 목표는 있다. 인간은 가슴속에 낙원을 품은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우린 그걸 꿈이라고 부른다. 강재는 번듯한 배 한 척 마련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루고자 비루하고 무의미한 현실을 견뎌낸다.

하류 건달의 뒷골목 표류기 같은 영화의 물길은 난초처럼 청초한 파이란(장백지)의 등장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중국에서 온 파이란은 한국에 체류하며 돈을 벌기 위해 강재와 위장 결혼한다. 삼류 건달이 측은지심이나 휴머니즘에 근거해 그녀의 괜찮은 남편이 되어줄 리 만무하다. 강재는 뒷돈만 챙기고 파이란을 돌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허드렛일에 파묻힌 채 골방에서 겨울을 나는 파이란은 강재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리움을 쏟아낸다. 강재를 향해 투명한 연정을 품는다.


영화 파이란(출처: movie.daum.net)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누일 곳이 필요하지 않은가. 몸이 아닌 마음을 누일 곳이. 낯선 땅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야 하는 파이란도 어쩌면 그러했으리라.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의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파이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강재는 기차에 올라 그녀가 서툰 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재씨,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파이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강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파이란이 자기를 연모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강재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감정의 스위치를 켠다. 강재는 파이란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서럽게 흐느낀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려 애쓰지만 소용없다. 강재는 파이란의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깊고 긴 울음을 토해낸다.


영화 파이란(출처: movie.daum.net)


사실 <파이란>의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 같기도 하다. 사골 국물 우려내듯 반복되는, 뻔한 조폭 영화의 계보를 잇는 것 같다.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던 순간, 극장 안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나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강재가 파이란을 생각하며 토해낸 닭똥 같은 눈물이 내 귀로 들어와 가슴에 고이던 순간, 나는 그리움의 본질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움은 무엇인가?


그리움은 손이 닿지 않는 것이 보고 싶어

한없이 애타는 마음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감히 틀어막을 수 없는 허공의 간극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꽃을 닮았다.

마음으로 품었으나 두 팔로는 품지 못한 꽃이다.


결코 잡히지 않으므로 만져지지 않는 꽃이다.

그래서 애타게 동경할 수밖에 없는 꽃이다.



누구든 그런 꽃 한 송이쯤 마음에 심어놓았을 것이다. 봄이 솟아나고 여름이 밀려와 무수히 많은 꽃이 화단에 만발해도, 아끼는 꽃잎 하나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으로 떨어져 바스러지면, 그 덧없음과 그리움을 도무지 달랠 길이 없다. 마음에서 그리움을 단번에 밀쳐낼 수 있는 어떤 감정도 없다.


그리움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말은,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다는 말의 동의어인지도 모를 노릇이다.


다만 어떤 그리움은 삶의 은밀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매일 그리워하면서 ‘그리움의 힘’으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지 모른다. 강재가 고향을 떠올리며 삶을 살아낸 것처럼, 파이란이 강재를 마음에 품은 채 현실을 버틴 것처럼....


  <한때 소중했던 것들>  중에서




이기주 작가입니다. 말을 아껴 글을 씁니다. 타인을 쉽게 평가할수록 내 삶이 마모되므로, 책과 사람을 그저 음미하며 살아갑니다. 지은 책으론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 등이 있습니다. 신간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을 출간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한 계절입니다. 당신만의 리듬으로 계절을 건너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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