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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Jul 16. 2018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어느 날 서점에서 얻은 삶의 고갱이 하나

조금 과장하면, 난 1년 365일 가운데 300일 정도 서점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신간과 구간을 마음껏 펼쳐보고 책을 한 권 구매한 다음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활자를 읽는다.


더욱이 난 집필실이나 작업 공간이 따로 없다. 집에선 다락방에서 글을 쓰되, 밖에선 서점과 서점 근처에 있는 카페를 돌아다니며 원고를 작성하고 업무를 처리한다. 이를 측은하게 바라보지는 마시길. 일하는 공간이 따로 없다는 것은, 모든 장소가 일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교보문고 백석점

서점에서 내 책을 읽는 독자가 시야에 들어오는 날이면 슬쩍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독자는 정신적 혹은 물리적 의미로서의 ‘곁’을 잠시 작가에게 내어주는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정말 이기주 작가세요? 에이, 출판사 직원이죠?” 같은 반응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삶의 고갱이를 서점에서 얻어 오는 날도 있다. 삶의 본질과 이치 같은 것을 굳이 멀고 특별한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때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학설이 아니라 집 근처 편의점 직원과 부동산 중개인의 말 한마디를 귀담아들으면 실물 경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때론 저명한 철학자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밑줄 친 문장이 아니라 출근길에 부모가 넌지시 던지는 당부 한마디에서 인생의 본질을 헤아릴 수 있다.


소박하고 가까운 것에서 크고 원대한 것으로, 지엽에서 본질로, 일상에서 인생으로 생각의 영역을 확장할 때 우린 삶의 정수에 바짝 다가설 수 있다.



한 번은 서울 반포에 있는 서점에서 독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삶의 이치 하나를 길어올릴 수 있었다.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한 어르신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실례합니다. 이기주 작가님 맞죠? 책 잘 읽었어요. 정말 서점을 방황하시네요?”


“하하. 네, 그럼요.”


“작가님 만나면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제가 약국을 운영한 지 30년 가까이 됩니다. 매일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약을 지어주는데요, 조제한 약을 건넬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음, 글쎄요...”


“대부분 사람은 기운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의기소침한 누군가에게 ‘기운 좀 내!’라고 말하지만, 정작 삶을 이끄는 것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이 아닐까 싶어요.”



어르신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손뼉을 치며 환호할 뻔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얼떨결에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알몸으로 뛰쳐나오며 “유레카”를 외칠 때 꼭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누구도 기분과 기운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짚어내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는 듯했다.


어르신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앞으로 되감듯, 삶을 되새겨보았다. 뭐랄까. 기분이 뭉개진 탓에 기운을 내지 못했거나 기분을 추슬러 겨우 기운을 낼 수 있었던 기억들이, 30분 넘게 기다렸는데 승객을 많이 태워서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정류장을 통과하는 광역버스처럼 내 머릿속에서 ‘쌩’ 하고 스쳐 지나갔다.


성석제 작가는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서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산물이고 사랑을 연료로 작동하는 사랑의 기계이다”라고 했다. 이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얘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기분이 나쁘면 기운을 낼 수 없는, 기분의 산물이고 기분을 연료로 하는 기분의 기계이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  중에서



마포의 한 스튜디오




이기주 작가입니다. 말을 아껴 글을 씁니다. 타인을 쉽게 평가할수록 내 삶이 마모되므로, 책과 사람을 그저 음미하며 살아갑니다. 지은 책으론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 등이 있습니다. 신간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을 출간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한 계절입니다. 당신만의 리듬으로 계절을 건너가세요.


한때 소중했던 것들: 지금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지난날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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