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잉크에 관하여
다락방에서 책을 정리하다 구석에 방치된 동화책 꾸러미를 발견했다. 먼지를 떨어내고 책장을 넘기자 오래된 종이에서 솟아나는 부스럭 부스럭 소리와 퀴퀴한 냄새가 귀와 코로 밀려 들어왔다.
순간, 어린 시절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대화가 기억 저편에서 가물거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종로에 있는 헌책방에 아버지를 따라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오즈의 마법사》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집에 가기 싫다며 떼를 쓰던 나는 결국 수십 권짜리 동화 전집을 끌어안고 나왔다. 아버지는 “다 읽으면 또 사줄게” 하고 조곤조곤 말했고 난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책과 연결되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한 문학평론가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한 번쯤 읽어본 《오즈의 마법사》는 소녀의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의 화폐 제도를 다룬 정치적 우화입니다. 사실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동화 중 상당수가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됐죠.”
난 평론가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에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한동안 동화책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동화책과 멀어질 즈음,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이었다. 헌책방에서 가져온 책을 다 읽으면 또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아버지는 황망히 가족 곁을 떠났다.
세월의 터널을 통과한 나는 작가가 되었다. 삶에 부대끼고 미끄러지면서 생각과 감정의 무늬를 나만의 문장으로 옮기며 살아가고 있다. 수십 년 전 책과 나를 연결해준 아버지는 집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철부지 꼬마가 훗날 작가가 될 거라는 걸 짐작이나 했을까? 모르겠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아버지께 질문을 건넬 수도, 내 책을 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동화책에 묻은 먼지를 종종 떨어내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흔적을 매만지는 수밖에. 그렇게 슬며시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걸을 때 종로 거리에 내리꽂히던 맑은 햇살과 늦은 밤 책방을 나서는 순간 세상을 환하게 비추던 보름달을 떠올려보는 수밖에….
‘삶’은 동사 ‘살다’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 ‘-ㅁ’을 붙여서 만든 명사다. 그저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와 의지를 갖고 영위해나가는 동적인 과정이 삶이다.
단, 삶은 유한하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다.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살아가는 일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사라지느냐,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가 먼저 사라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라짐과 헤어짐은 그리움을 낳는다. 이별을 곧바로, 결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로 애도하거나 마음속 은밀한 곳에 ‘기억의 서랍’을 만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과거에 대한 향수는 기억의 맨 위 칸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미련과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은 가운데 칸에, 하늘로 떠나보낸 부모와 자식을 향한 애틋함은 제일 아래 칸에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기억’과 어울리는 동사는 ‘잊다’가 아니라 ‘접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잊히는 기억이 있지만,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기억만큼은 종이학처럼 곱게 접힌 채 마음속 한구석에 보관되니 말이다.
마음의 밑바닥에 접어둔 기억은 살아가는 동안 숱한 계기에 의해 수없이 되살아난다. 기억은 돌돌 말아서 반듯하게 정리해놓은 속옷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 같아서, 때때로 제자리를 벗어나 마음속을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기억의 활동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날이 문제다. 쓰디쓴 기억이 가슴에 새겨진 상흔을 들쑤시는 것도 모자라 머릿속에 꽉 들어차 몇 날 며칠이고 꼼짝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기억에 스며 있는 삶의 비애와 상처까지 곪아 터지고 만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시간의 물결에 올라타서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있다 보면 끝내 썩어버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질량을 갖는 물질만 그런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인간의 심리와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정서적 요소야말로 그렇지 않나 싶다. 적절한 시점에 적당한 양을 방출해야 한다. 마음의 안쪽에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이런 이유로 우린 한때 소중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그 사람이 곁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으로 건네준 눈빛을 생각하며 눈물을 쏟아내고, 안 쓰던 일기를 쓰거나 책 귀퉁이에 낙서를 끼적이는 게 아닐까. 그렇게라도 그리움을 토해내야 하기에, 그래야 견딜 수 있기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10분밖에 지속하지 않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고, 몸 구석구석에 문신을 새긴다.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읊조린다. “현재의 나를 알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사정은 다르지만 나 역시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추억 밖으로 밀려나는 순간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뻗어가며 기억의 고삐를 틀어쥐고 글을 쓴다. 기억을 덜어내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채워나간다. 서정주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내 문장을 키운 것은 팔 할이 기억이다.
인간은 기억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히 기억 밖으로 도망칠 수 없다. 한마디로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다. 간다 간다 해도 본래 그 자리, 왔다 왔다 해도 겨우 출발한 자리다.
어차피 평생 기억 속을 헤매야 한다면, 난 이미 기억에 배어 있거나 언젠가 기억으로 전환될 삶의 희로애락을 몽땅 책으로 옮기고 싶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기억은 문장을 이끌어내는 글쓰기의 원천이 된다. 게다가 기억이라는 잉크는 흘러넘칠 순 있어도 마르지는 않는다.
돌아보면 언제나 내 책상 위로 기억이 흘렀다.
눈물을 떨구며 기억을 더듬는 손끝에서
나만의 문장이 피어났다.
그러므로 내가 쓴 책은 내 기억의 집합체이며,
내 문장은 내 기억을 실어 나르는 배다.
그 배에 실린 기억이 독자라는 육지에 닿아서 ‘내가 겪은 아픔을 이기주 작가도 겪었구나, 비슷한 슬픔의 무게를 견뎠구나’ 하는 공감으로 거듭난다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글쓰기는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에게 문장을 건네며 말을 걸어보는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도 그랬나요?”, “한때 눈물을 다 써버릴 정도로 아팠던 기억이 있었나요?”라고 말이다.
이기주 작가입니다. 지은 책으론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 <한때 소중했던 것들> 등이 있습니다. 신간 《글의 품격》을 준비 중입니다. 한 권의 책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지만 밖으로 나오는 문은 여럿이 아닐까 생각해요. 책 안에 다양한 샛길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글의 품격》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활자의 길’을 각자의 리듬으로 자유롭게 거닐었으면 합니다. 길 위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죠. 다만 제 책을 덮은 뒤 당신의 손끝에서 돋아난 문장이 소중한 이들의 가슴에 가닿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일으킨 문장의 물결이, 당신의 진심을 실어 나르기를 바랍니다. 이기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