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세월을 공유하는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꽃이 영원히 피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도 매한가지다. ‘인생은 유한하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늘 무력하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일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먼저 사라지느냐, 아니면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가 먼저 사라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단, 대부분 사람은 세월의 공세에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월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손을 움켜쥔다. 그리움과 후회를 뼛속에 새겨 넣지 않기 위해...
그렇게 세월의 파고를 견디며 그 위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다 보면 무수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 특히 부모 자식 간의 역할이 일정 부분 포개지거나 뒤바뀌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자식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부모가 어느새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돌봄을 받기만 하던 자식이 반대로 부모를 돌봐야 하는 시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아마도 몇 해 전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날따라 여러 검사를 받느라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진료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병원동에서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몇 분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한 헛기침을 해대며 질문을 건넸다.
“흠흠. 날도 선선한데 뜨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이나 먹고 갈까요?”
“......”
어머니는 내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개 부모가 그렇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자식한테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 되도록 도움을 주진 못할망정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스스로 미안쩍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날 어머니는 먹고 싶은 음식을 나열하는 대신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 것 같구나...”
어머니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시간’이란 단어가 귓속으로 스며들어 쉴 새 없이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들릴 듯 말 듯 “시간...”이라고 웅얼거렸다.
차를 몰아 이동하는 내내 “내가 네 시간을 뺏는 것 같구나"라는 어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시간’과 ‘사랑’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세월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특히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면, 그 사람이 내 일상에 침입해 시간을 훔쳐 달아나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할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라는 감정과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말이다.
이기주 작가입니다. 지은 책으론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 <한때 소중했던 것들> 등이 있습니다. 최근엔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를 출간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지만 나오는 문은 여럿이 아닐까 생각해요. 책 안에 여러 샛길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라는 ‘활자의 숲’ 곳곳에 나 있는 샛길을 각자의 리듬으로 산책하면서, 자유롭게 보고 듣고 느껴주세요. 마음을 꾹꾹 눌러 작은 길들을 걷다 보면, 길 저편에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기꺼이 시간을 건네주고자 했던 소중한 사람과...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합니다. 우린 늘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새봄이 걸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기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