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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지옥'을 보고, '종교'와 '철학'을 생각하다.

'종교'와 '철학'의 차이는 '깨달음'의 주체자가 누구인지 여부이다.

2022년 브런치 첫 포스팅의 주제는 약간 무거울 수도 있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우리의 삶 속에서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멀리할 수 없는 '종교'와 '철학'에 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정신적으로는 그렇고 물리적으로?라고 의문을 품은 독자도 계실 테고,,, 웃은 분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웃은 분은 저와 웃음 코드가 맞는 분일지도...


높은 층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창문 밖에만 봐도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그리고 골목이 많은 주택가에 사시는 분들은 철학관이 심심치 않게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종교와 철학이 사람의 정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물리적으로도 근거리에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다.


앞서 언급했듯 무겁고 어려운 주제일 수 있어, 최근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이어 K-culture 붐을 이어간 K-story, 드라마 '지옥'을 일부 빌어 '종교'와 '철학'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림 출처: https://kiss7.tistory.com/2536

드라마 '지옥'이 서양에서 그것도 유럽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뭘까?

여러 매체를 통해 분석해본 결과, 그들의 머릿속을 한 차례 휘젓는 질문을 던진 영향이 크다.

그 질문은...

지옥(종교)이 뭔데?

다양한 종교의 이미지 형상

그림 출처: http://1.bp.blogspot.com/-MgNqLWRC-Yo/UL5cAGxS4yI/AAAAAAAAA8Q/Mt_78U7sEao/s1600/Religious+Diversity.png


종교에서 극락, 천당, 천국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이후의 삶을 최대한 아름답게 일컫는 표현이며, 지옥은 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현생의 삶을 잘 살아야 죽어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대표적 키워드다.

즉 여기서 지옥은 온전한 지옥만을 일컫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불신지옥'은 '기복신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믿지 않는 자 지옥 갈 것이고 믿고 기도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는 의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영등포역이나 서울역, 명동거리 등에서 확성기를 켜고 선교 활동하는 분들을 떠올리면 해당 키워드가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드라마 '지옥'은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하고 간략하게 해당 주제와 관련해서만 설명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한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극적 질문은 시작된다.

그 괴물은 누구고, 어떤 사람을 죽이는 것인가?

유일한 단서는 하나다.

죽기 전, 어떤 혼령 같은 존재가 자신이 죽는 일시를 미리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1초의 오차도 없이 어김없이 그 시간이 되면 예고된 죽음이 찾아온다. 그 괴생명체와 함께...


드라마에서는 그것을 '신의 고지'라고 일컫는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키워드,

신(神)의 고지

드라마 '지옥'에서 '신의 고지'를 받는 장면

이 드라마의 핵심 키워드는 '지옥'이 아니라 '신의 고지'라고 생각한다.

'지옥'은 말 그대로 자신이 죽을 날을 받고나서부터가 시작되는 것일 뿐,,,

죽은 후의 '지옥'은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괴물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신의 고지'가 결국 이 드라마 스토리의 최대 공포 이슈이다.


'신의 고지'라고 말하는 이들은 극 중 새진리회라는 종교 단체며, 그들의 교주 정진수(유아인)가 주창한 것이다.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를 누군가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이에 추종하는 자들이 이 사회에 집단 무의식을 만들어, 해당 종교 신도가 아님에도 일정 부분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이 드라마를 보면, 작금의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 세계, 천벌 등의 다소 비과학적인 논리 전개가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우리 뇌의 사고체계 속에 어느 틈엔가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됨에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고 난 뒤에 우리가 느끼는 극적 질문에 오랫동안 천당, 지옥의 존재를 매우 당연시하며, 자연스럽게 믿고 있던 기독교, 천주교 교인들이 다수인 서양에서 나름 충격적인 스토리라고 인식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만약 그동안 믿고 있는 지옥의 실체가 이런 것이라면 우린 무엇을 믿었던 것인가?!라는 종교적 물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지 말이다.


암 선고를 받으면 인간이 보이는 패턴이 있다고들 말한다.

'충격(Shock) - 부정(Denial) - 저항(Resistance) - 수용(Acceptance)의 4단계'

우리는 드라마 속 배우의 모습을 통해 이런 유사한 진행과정을 본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멍해지며, 다음은 오진을 의심하고 부정하며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재검사를 하다 동일한 결과를 들은 후 당장의 치료에 대한 권유도 뿌리치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분노하며 좌절하게 되는 캐릭터의 모습 말이다. 먼 미래라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에게 가깝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 시기가 지나면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과 병마와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비단 암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서만 관찰되는 것은 아니다.

범죄자가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도 이런 패턴을 보인다.

리드(REID)의 수사기법 중 신문방법 총 9단계가 이런 피의자의 행동 패턴에 대응하는 매뉴얼이다.

범죄자도 처음에는 검거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며 부정한다.

수사관이 제시하는 명백한 증거에 대해서 조작됐다며 저항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소용없다는 것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이유는 범행에 대한 속사정에 관한 진실은 별개라고 하더라도, 범죄 행위를 한 것은 결과적으로 본인이 맞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기에, 종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출처: https://www.facebook.com/yonseipor/

'종교', '철학' 얘기를 하자고 해놓고, 드라마 '지옥'을 언급하다 갑자기 왜 암 선고받은 환자와 검거된 범죄자의 심리적 변화 4단계를 설명하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위와 같은 설명의 중심엔 사람이 있고, 이를 관통하는 조건인 위기, 공포, 절망의 상황에서 보이는 인간의 조건 반사적 행동 패턴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위기 상황에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해결하기 위해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단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들다.

앞서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의 고통, 범죄자가 체포된 후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드라마 '지옥'에서 '신의 고지'라는 이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지리멸렬한 모습 속에서 누군가가 선지자적 모습으로 내 대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 방법, 길을 일일이 다 알려준다면 안심되고 안도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종교를 찾는 이유다.


종교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종교(宗敎)「명사」『종교 일반』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쓰여있다.

종교의 3요소는 교리, 교주, 신도라고 말한다.

현실 속 어려움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교리에서 알려주고, 교주가 이를 설명해주고 인도한다.

신도들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이라 외롭지 않고 든든하다.

그래서 이들의 결속력은 가히 군대 못지않다.


철학은 어떠한가?

서두에 언급한 골목 어귀에 있는 철학관이 그 철학의 전부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철학관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철학을 알려주는 공간으로 시작했을 터...

그러나 작금의 철학관은 점집처럼 여겨져 안타깝다.

철학관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철학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철학(哲學)「명사」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종교와 철학 모두 삶의 궁극적 의미, 본질에 대한 언급이 있다.

결국 삶의 주체자는 인간이기에,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인지를 알려주는 분야임은 둘 다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구분은 있다.

바로 본 글의 소제목에도 적은 바와 같이...

'깨달음'의 주체자가 누구인가?!

이것이 핵심이다.


종교는 절대자 신, 교주가 있고, 이들이 내세우는 교리, 예를 들어 십계명 같은 것이 성경책에 쓰여 있다.

즉 교주가 깨달은 것을 신도는 의심하지 않고 무한한 신뢰와 믿음으로 이를 실천하며 따름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철학은 절대자, 교주는 없고, 여러 학설과 가설, 이론, 사상을 주창한 학자들만이 있으며,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론적 역설만이 난무한다. 즉 이런 여러 사상, 이론들을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깨달으며,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깨우쳐주지 않는다.


종교와 철학은 그래서 '깨달음'의 주체자가 누구인지가 핵심인 것이다.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할 때 시간적으로는 '종교'가 효율성이 높다.

그러나 잘못된 종교, 즉 이단 종교나 부도덕한 교주(종교 지도자)를 만나면 삶은 피폐해진다.

부작용이 매우 크다.


철학은 스스로 여러 학설, 이론, 사상을 여러 방법론적 사고를 통해 공부하고 연구하며, 분석해서 스스로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지혜를 얻고 깨닫는 과정이 매우 길고, 험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지식과 식견이 풍성해지면, 삶의 가치적 판단에 대한 기준이 정립된 성장한 자아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어, 웬만한 어려움에는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생긴다. 따라서 이에 따른 자존감도 높아진다.

그러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또한 종교에도 이단 종교처럼 부작용이 있듯이, 철학에도 어설픈 깨달음은 헛된 신념의 근거가 되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부작용 역시 존재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종교를 만나, 틈날 때마다 나만의 철학적 사고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철학적 사고로 종교를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아를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드라마 '지옥'에서와 같이 알 수 없는 위기가 사회에서 발생되었을 때, 이를 누군가의 사견으로 예단하고 속단하여 맹신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과학적 합리적 객관적 논리 논증을 통한 사고로 해석하고, 이에 대응하는 자세로 뜻을 모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림출처: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002041103001

현재 코로나19, 오미크론-이런 바이러스 공포 팬데믹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지 현실이 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3년째 경험하고 있다.

마스크를 벗고 지하철을 탄 내 모습이 잊힐 정도다.

이럴 때 백신을 맞느냐 맞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종교와 철학의 차이만큼이나 묘하게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당연히 백신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누구의 판단도 아닌 내 판단으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고,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고 말이다. 맞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맞을 수 없는 처지의 사람에게 강제로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맞을 수 있는 여건임에도 맞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주저하는 이들에게는 백신 접종이 위기상황(감염)에서 생존확률을 높인다는 것,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계속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판단 능력이 갈수록 중요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많은 선택의 기로, 수많은 옵션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7세 이상만 되면 인간은 논리적 사고, 인지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아동발달과정에 보면 나와있다.

그러면 왜 미성년자와의 거래를 우리 법에서는 금치산자 취급할까?

논리적 사고와 인지 사고와 별개로 판단 능력은 성년 이상의 물리적 시간만큼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교', '철학'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것이 좋고 나쁘다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적절한 경험 시간을 두고 훗날 판단하기 바란다.

그 전에는 섣불리 예단, 속단, 단언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2022년, 올 한 해도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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