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혐오와 분노의 게이지가 레드라인에 근접하고 있음을 인지하자!
오늘 아침 뉴스가 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11월 예정이었던 APEC정상회의 개최를 칠레가 포기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국제적인 행사를 불과 며칠 앞두고 포기하겠다는 것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다.
그 유래 없는 일을 촉발시킨 이유가 바로 칠레 시민들의 '양극화 분노'시위다.
양극화 분노에 산티아고는 불타고 있다.
트리거가 된 사건은 대중교통 요금 인상이었다.
우리나라 돈 50원 인상이었다.
비단 이 50원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지속적인 시민들의 부담 가중, 빈인빈 부익부, 기득권들의 카르텔, 불공정, 불편부당, 적폐 세력의
부정부패 비리 축적, 권력 사유화 등이 함축된 시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런 시민들의 분노는 여러 갈래로 표출되고 있다.
당장의 우리나라도 주말마다 큰 집회가 열리고 있다.
영화 기생충과 조커가 예술성,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스토리를 관통하는 정서적 공감대는 사회 양극화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니 등골이 서늘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시민들 통각 의식이 식역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음을 방증하는 사태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불거지면 그때야 대책을 세우는 것에 익숙하다.
당면과제가 산적한데 미리 예비 예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회 양극화가 당면과제를 넘어서, 개혁의 대상으로 대두된 만큼 이에 발맞추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상태까지 오지 않았나 걱정이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우스개 말장난 같은 소모적 논쟁의 사안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성싶다.
시민들의 분노 게이지가 극에 달했다는 신호가 전 세계적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게이지의 메인 코어의 시스템은 바로 '자본주의'다.
무한 자유경쟁이라고 불리는 시스템,
한때는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공평한 기회의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스템이 되었다.
돈이 권력이고, 깡패고, 법 위에 있음을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 시스템,
온갖 잡스런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이제는 메인 코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자라면서 그 천박한 자본주의에 눈물 흘리며,
당연하게 이번 생애는 망했다. 다음 생애를 기약해야 하는 자존감 제로 베이스를 경험해야 하는
타락한 시스템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극소수의 바이러스 집단에 휘둘리고 있다.
범죄자적 성격이론(Yochelson & Samenow, 1976)에 보면,
'범죄자의 사고특성'의 가장 큰 정서가 Zero state 즉, 무가치감의 상태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이런 감정을 없애기 위해 사고 과정에서 인지부조화를 초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남 탓, 환경 탓, 사회 탓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부정적 정서가 내재되며, 축적되다가 폭발해서 외적으로 표출되면,
바로 범죄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범죄심리학에서 말하는 범죄자적 성격이론이다.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럴듯하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들이 사회 부조리를 언급하는 시민들에게 자존감을 키우라는 헛소리를 할 수 있는
이론의 배경이 이런 논리사고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민들 대다수가 범죄자가 되겠다고 나서면 어쩔 것인가?
그래도 자존감을 키우라! 환경 탓, 사회 탓 말고, 스스로 능력과 실력을 키워서 성공하라 말할 수 있는가?!
현재 이런 상황을 촉발케 하는 소수 적폐 세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왜곡하고, 사실관계를 호도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카르텔을 비호하려고 할 것이다.
늘 그렇게 그들은 이런 류의 위기를 극복했으니까...
그러나 시민들 정서 하나하나의 분노 게이지는 이제 그 임계점에 다다랐다.
그 열감을 식히기에는 지구 온난화 문제처럼 구조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한,
일시적인 해열제 따위에는 쉽게 내려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노 게이지가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노랑, 주황을 넘어 레드 라인에 근접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다.
이 영화들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전문가와 시민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그 공감을 평가하고 있다.
시민들의 정서 게이지가 평온할 때의 그린, 블루가 언제였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를 누렸던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만이 아득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득한 기억을 선명하게 바꾸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에 얽매여 작금의 신호를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기에는 이미 우리들의 상처가 크고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