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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Oct 28. 2020

접어둔 페이지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접어둔 페이지 - <월든>     


삶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가? 우리는 왜 계속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가?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가? 소위 고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 지혜를 내 안에 담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안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살아가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가? 대관절 삶이란 무엇인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돈인가? 사랑인가? 행복인가? 건강인가? 명예인가? 남들보다 위에 서는 것이 정말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인가? 혹여나 그렇다고 한다면, 반드시 사회적 지위나 돈의 영역에서 누군가의 위에 서야만 하는가? 그렇게 군림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가? 누군가의 밑에 있는 사람은 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단 한 명을 제외한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걸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목표로 삼을 중요한 가치라는 게 존재하는가? 삶에 당위와 근거, 목표가 필요한가?


우리에게는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하는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수많은 재산을 지니고 5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건희의 말년은 어땠는가? 삼성서울병원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돈으로도 고치지 못하는 자신의 질병에 절망했을까? 그 많던 돈과 명예, 사람들이 보내는 관심은 모두 허상이었다며 허망해 했을까? 아니면 경주마처럼 달려오던 삶을 되돌아보고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까? 남들은 모아놓은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병원신세를 지느라 불행하리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거기서 정말 행복을 찾지는 않았을까?


돈이 문제인가? 아니면 마음이 문제인가? 부유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나은가? 가난하지만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나은가? 세상 사람들은 돈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정말 돈이 최고인가? 그렇다면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인기 연예인은 뭐가 모자라서 우울증을 겪고 자살을 하는가? 악플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돈이 만병통치약은 아닌 것 아닌가? 마음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정신과 의사들의 책이나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들으면 대기업 임원이나 전문직 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한 사람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데, 그들은 돈이 많음에도 왜 고통받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데도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타인의 인정에 몰두하는가?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따라가려 하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고 하는데 굳이 사회나 주변의 시선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정답이 없다면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안전한 길을 걷고 싶은 것이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정답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실제로 정답이 없다면 많은 이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 정답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계속해서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당연한 것인가? 맞지 않은 길을 걷는 자는 무가치한 도태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을 걸어서 성공에 다다르고, 아예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하워드 슐츠 같은 이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가는 과정이 다르고 독특했을 뿐이지 결국은 부와 명예, 사회적 인정이라는 결과물에 도달한 것은 동일하므로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다를 바 없는가? 그렇다면 결국 사회가 이야기하는 정답이 바로 정답인가? 답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는 별개로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있는가? 목적지만 명확하고 그 길은 무한한 것이 현실인가? 그럼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혹자는 주변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에 마음을 기울이라고 하는데, 내가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분간이 되는가? 해야 할 일 중에는 정말 내가 해야 할 일과 남들이 하라고 해서 내가 당연히 해야되는 줄 아는, 사실은 할 이유가 없는 일도 있지 않을까?


삶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며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인가? 정신과나 심리 전문가가 이야기하는 소위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의미가 있는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건네는 값싼 위로이자 체념의 심리학은 아닌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과 체념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현실을 수용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또 무엇이 다른가?


사회와 나의 목소리 중에서 나는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무엇이 진실로 존경할만한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맞는가? 역사 앞에 서서 당당할 수 있으려면, 내 목소리가 아니라 후대가 어떻게 평가할지를 고려해 선택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내 스스로 생각하고 다다른 결론이 자연률에 합당한 선택이라고 자부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개인의 양심이란 늘 옳은가? 정녕 내 양심을 따라 행동해도 되는가? 개인의 양심의 위치는 정말 지고지순하고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 내려준 절대적인 가치가 맞는가? 현실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양심의 위치는 도대체 어디인가? 그 양심의 위치는 내가 정하는 것인가, 사회가 정하는 것인가? 혹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인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인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사회적 동물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행복을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면 그 삶도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더 높은 법칙"이란 존재하는가? 반드시 따라야 할 기준과 절대선이 정말로 있는가? 개인이 정말 국가보다 중요한가? 그렇다면 이완용이 스스로 떳떳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면 우리가 그를 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국가가 개인보다 중요한 것인가?


내 행복과 부귀영화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가치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를 내가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그들에게 화를 내도 되는가? 값싼 동정이고 오만은 아닌가? 안정된 전문직의 가도를 걷기를 선택한 젊은이들을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는가?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는 게 삶이라면, 삶은 정말 소중한 것이 맞는가? 알면 알수록 체념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삶이 소중한 이유를 내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삶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본래 의미가 없는 것에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해도 되는가? 그렇다면 내가 부여한 의미는 의미가 있으되,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오히려, 사회가 삶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가 더 크고 중요한 의미 아닌가? 한 사회의 패러다임은 내가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이 존재하고, 내가 살아가는 내내 존속하고, 또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지속될 가치관이 아닌가?      


정말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아마, 죽기 직전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한 번 살아보는 게 인생 아닐까?

그래서 인생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김선수 대법관님의 사법시험 합격 수기인 "접어둔 페이지"에서 아이디어를 따왔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은 대법관님의 합격수기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아래는 인상 깊은 인용구 5개를 소개했습니다. 이 인용구에 흥미가 동해 다들 한 번쯤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읽은 책 정보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월든>, 강승영 옮김, 이레, 2004(개정2판)"입니다.


노동자는 단순한 기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될 시간이 없다. 인간이 향상하려면 자신의 무식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데, 자기가 아는 바를 수시로 사용해야만 하는 그가 어떻게 항상 자신의 무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를 평가하기 전에 그에게 가끔 무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우리의 강장제로 그의 기운을 북돋아주어야 하겠다. 인간성의 가장 훌륭한 면들은 마치 과일 껍질에 붙어 있는 과분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는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가난 때문에 인생살이가 쉽지 않아서 때로는 숨이 차 헐떡거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미 끝내버린 식사대를 다 지불하지 못하고 있고, 입고 있는 옷이나 구두가 다 해졌는데도 그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 이 책도 빚쟁이로부터 빌리거나 훔친 시간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 14쪽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개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의 원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 26쪽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 102쪽
사회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의무는 아니다. 자기 내부의 법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견지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 460쪽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의 천성에 맞는 여러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대신 끌어다 댈 수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애를 써서 머리 위에 청색 유리로 된 하늘을 만들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 그런 것은 없다는 듯이 그 훨씬 너머로 정기에 가득 찬 진짜 하늘을 바라볼 것인데.
- 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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