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메다 Dec 05. 2020

나를 찾는 여행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부제는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 제목보다는 부제가 훨씬 와 닿는다.

청소년 권장도서로 많이 꼽는 책이지만,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먼저 중고등학생이 읽기는 내용이 어렵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과 대학 신입생 때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작품 구조는 쉽지만 은유가 많아 어려운 작품이다. 또한 정말로 자유를 얻고 방황하며 나를 찾아가는 시기는 10대가 아닌 20대이다. 수능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중고등학생이 읽고 무슨 감흥이 생길까 싶다. 생각에 변화가 생기더라도 행동 변화는 따라오지 못할 것 같다. 오히려 그런 경주를 끝낸 다음,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시간은 20대가 정말 청춘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못했다. 다른 애들이 하듯이 내 안에 어둡게 감추어진 목적을 끄집어내서 내 앞 어딘가에 또렷이 그려보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어떤 이점이 있을지 잘 알았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뭔가가 되겠지만, 그게 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어쩌면 여러 해 동안 찾고 또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긴 하지만 그것이 사악하고 위험하고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개 꿈이 있었다. 하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 정치외교학과에 갔고, 하나는 파일럿이 되고 싶어서 공군사관학교에 갔다. 나도 원하는 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진학하고 보니 내 꿈이 정말 선생님인가 의문이 든다. 역사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역사수업은 별 재미가 없었다. 차선으로 생각했던 국어교육과 복수전공도 포기했다. 내 생각과 너무 달랐다. 정작 수능이라는 관문을 통과해놓고 나는 길을 잃었다.


내 길은 수능에서 끝나는 단기 레이스가 아니었다. 수능은 거쳐가야 할 하나의 오르막이었다. 그 뒤에 계속해서 내가 걸어갈 길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수능을 넘어 조금 걷다 보니 길이 사라졌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 앞도, 뒤도, 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꾸역꾸역 교육행시를 준비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정말 교육에 뜻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꿈만 모르는 게 아니다. 나 자신도 모른다.     


깊고 푸른 무기력에 빠졌다. 평소에도 철벅철벅 그 푸른 물을 밟고 다녔다. 물은 항상 발목 언저리에 있었다. 너무나 오래됐고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불편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닥에 구멍이 났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배였나 보다. 구멍으로 푸른 물이 밀려와 나를 집어삼켰다.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전문가에게 심리상담을 받고, 병원에 찾아가 약도 먹었다. 다행히 수위가 많이 내려가서 물은 다시 발목에 차있다. 하지만 그 전과는 조금 다르다.


예전엔 물웅덩이가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남들은 타박타박하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처음으로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 있음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오랜 친구는 좀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바닥에 구멍이 뚫린 지 벌써 8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노란 꽃 대신 초록색 이끼와 함께 산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을 해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책상에 앉아 종이를 꺼내 놓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쭉 적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두 줄을 겨우 썼다.

1. 친구랑 게임하기

2. ...

그것이 내가 살아온 삶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 지도,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걸 찾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래야 이 푸른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내 꿈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정말 내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언제 그럴지 모르겠다. 싱클레어의 말처럼 여러 해 동안 찾고 또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찾고 찾아도 결국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럼 뭐 어때’ 하고 넘기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 헤맴의 끝에 보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네게 불쾌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게다가 네가 지금 어떤 목적으로 그 잔을 들이켜는지 우리 둘 다 모르지. 네 안에서 네 삶을 만드는 것은 그걸 이미 알고 있겠지. 그걸 아는 건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누군가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한다는 사실 말이야. 그런데 용서해라. 난 그만 집에 가야겠어. “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까? 뭘 하고 싶어 하고, 무슨 꿈이 있을까. 시간은 많다. 돈은 없지만 몸도 멀쩡하다.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혹시 찾지 못할까 봐 두렵다.


방법은 알고 있다. 데미안의 말과 같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지만 내 안에서 내 삶을 만드는 것은 그걸 이미 알고 있다. 프로이트에서 시작된 상담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등에서는 이를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나의 역할은 무의식을 인지하는 것이다. 인지는 판단과 다르다. 판단은 인지한 사실에 나의 생각이 더해진다. 사실을 평가하게 된다. 인지는 나의 방어기제를 살피고,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 자연스러운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감정은 두려움(불안)이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내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무의식은 대책을 세운다.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방어기제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성숙하다고 평가받는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도망치는 것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투사, 전치, 주지화, 회피, 다 똑같이 도망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찾기를 무서워한다. 정확히는 나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여기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못난 사람이고, 그런 못난 나를 받아들이면 내가 정말로 못난 사람이 될까 봐,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또한 내가 원하지 않는 부분을 수용해버리면 그 부분을 내가 컨트롤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는 방어기제로 ‘회피’를 택한 거다. 모자란 나를 수용하려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수용하려면 너무 겁이 나니까, 아예 그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외면한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안다. 나는 결국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만 한다. 나는 나의 정신적 문제만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경우에도 다 마찬가지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젊은이라면 모두 다 다양한 경험을 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나를 들여다봐야 한다.          



”친애하는 싱클레어, 우리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야. 그 신은 신이며 동시에 악마지.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아프락사스는 자네의 생각 그 어느 것도, 자네의 꿈 그 어느 것도 반대하지 않아.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게.”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무슨 행동일까?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아프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특이한 신이다. 선한 면과 악한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신인 것이다. 굉장히 특이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세상에 어디 완전히 하얀 것이나 완전히 검은 것이 있던가? 그런 것은 없다. 이 세상은 수많은 회색분자의 집합체다. 사회 현상도, 인간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꽤 자주 잊고 산다.


무엇이든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100% 잘못된 것이나 100% 옳은 것이란 없다. 모두 그 이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인자 김성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사정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찬양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감정이나 성격, 행동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해야 할 대상이다. 아프락사스가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상담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OO 씨 감정은 뭐든지 항상 옳아요. 그냥 자연스러운 거예요.”


상사에게 혼이 났다고 치자. 모진 말을 들으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가 잘못해서 혼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화나는 것이 틀린 일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잘못해서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했다고 해서, 상사의 기분이 오늘 좋지 않은데 내가 그걸 캐치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화나는 감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지사다. 오히려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화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문제는 그다음 우리의 행동이다. 그 화를 부적절한 방식으로 해소하지만 않으면 된다. 화가 난다고 다시 부하직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지만, 산책을 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우리의 평가 대상은 행동이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살펴야 한다. 평가해서는 안 된다. 평가하는 순간 답 없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화는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네가 잘못한 상황인데 왜 화를 내?”라고 하면 내 자연스러운 감정은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된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통제하려 든다. 하지만 통제가 될 리가 없다. 끝없는 자책과 같은 잘못의 반복이 시작된다.


정답은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아, 내가 이리저리 해서 화가 났구나.’ 성격이나 특성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공부를 하지 않고 유튜브만 한 건 게으른 게 아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만, 그 이유를 “네 안에서 네 삶을 만드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걸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랬던 이유만 알면 된다. 그리고 그 무의식을 달래주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알아간다.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 보면 우리는 드디어 “네 안에서 네 삶을 만드는 것‘에 닿을 수 있다.          



"태어나는 일은 언제나 어렵죠. 당신도 알죠. 새는 알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애쓴다는 걸. 돌이켜 물어보세요. 길이 그토록 어려웠던가? 오직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그보다 더 아름답고 쉬운 길을 알 수 있었을까요?" (……) "그렇죠. 누구나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죠. 그러면 길이 쉬워져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지난 꿈을 밀어내고 새로운 꿈이 나타나죠. 그 어떤 꿈도 꼭 붙잡으려 해서는 안 돼요.”     


늘 어렵다. 글을 쓰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은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큼 어렵고 버거운 일이 없다. 물론 오직 어렵기만 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너무 짧았다. 사하라 사막에 검은 물감은 엎은 정도다.


매일을 살아가는 건,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태어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지금까지 쌓여 온 생활과 생각 패턴을 뒤로한 채, 새로운 인지도식을 그려나가야 하는 성격장애 환자인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정말,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고 상담사가 종종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대답한다.

“다시 태어나는 게 제일 빠르지 않을까요?”


싱클레어는 알에서 밖으로 나와 결국 날개를 펴고 아프락사스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인간이 될는지 모르겠다.


원랜 이런 자기 고백적이고 일방적인 일기가 아니라 어엿한 감상문이었는데, 쓰다 보니 방향을 잃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내가 늘 그렇지 뭐. 우연찮게 들어선 길에서 행운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냥 글을 마친다.

     

인간은 누구나 저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상들이 교차하는 지점, 단 한 번뿐이고 아주 특별한,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고 특이한 한 지점이다. 단 한 번만 그렇게 존재하는, 두 번 다시는 없는 지점이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소중하고 영원하고 거룩하며, 그래서 어쨌든 아직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충족시키는 인간은 누구라도 극히 주목할 만한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접어둔 페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