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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Dec 10. 2020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인간은 패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노인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하지는 않지."


한 노인이 거대한 물고기를 낚아 몇 날 밤을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다. 노인은 마침내 물고기를 잡아내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들이 물고기를 다 먹어버린다. 돌아온 노인에게 남은 건 상처투성이 몸밖에 없다.


<노인과 바다>는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이야기다. 한림원은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을 주며 특별히 <노인과 바다>를 언급했다.


우리는 <노인과 바다>의 어디에서 감동을 받았을까? 하나는 헤밍웨이의 뛰어난 서사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인의 불굴의 정신이라고 감히 예상해본다. 인간의 강인함과 나약함,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에 누구나 깊은 인상을 받았으리라.


나도 노인의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감탄했다. 노인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라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적인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노인과 바다>는 단순히 인간의 나약함과 자연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허무주의 소설은 아니다.     



"푹 쉬어라, 작은 새야."

노인은 말했다.

"그리고 어디든 열심히 날아가서 사람이나 새나 물고기처럼, 되든 안 되든 모험을 한번 해 보렴."

밤새 낚싯줄을 메고 있었더니 등이 뻣뻣해졌고 이제는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 그래서 자꾸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만 좋거든 여기 내 집에서 살아라, 새야."

(……)

노인은 이 순간 새가 같이 있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새는 이미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

"그 아이가 여기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그리고 소금도 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노인은 다시 중얼거렸다.     


사실 노인은 계속해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물고기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과 싸우는지 몰라서 답답해한다. 신체적 한계나 정신적 한계에 부딪혀 괴로워하기도 한다. 노인을 가장 심하게 괴롭히는 것은 바로 외로움이다. 노인은 계속해서 그 아이가 여기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이라는 대사를 외며 작품 처음과 끝에 나오는 아이(마놀린)를 그리워한다. 이 말은 단순히 손이 모자라거나 힘이 부쳐서 내뱉는 아쉬움의 표현이 아니다.


노인은 새에게 되든 안 되든 모험을 해보라고 이야기한다. 이상적이다. 그리고 뒤이어 말한다. 너만 좋다면 여기서 함께 살자고 말이다. 인간적이다. 새가 날아간 후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새가 같이 있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고. 나약하다. 그러고는 다시 읊조린다. 그 아이가 여기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그에게는 일손이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필요는 했다. 하지만 간절하지는 않았다. 망망대해에서 나를 도와 싸워줄 이 보다는 그저 함께 있어줄 이가 간절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나도 얼마나 그런 사람이 필요했는가. 하지만 그래 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신질환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많은 친구가 걱정해줬다. 관심을 써줬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자기들 안에서 부담감으로 바뀌었다. 한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너는 나아지지도 않고 점점 심해지더라. 그래서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을 했어. 네게 뭘 해줘야 할지 몰라서 너무나 부담스럽고 무서워.” 그러고 그 친구는 나를 떠났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도움 따위가 아니다.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비올 때 우산을 내어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외로움이다. 고독은 피할 수조차 없다. 누구나 그런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는가? 함께 놀고 있으면서도 혼자 있다는 느낌은 누구나 한 번쯤 받아봤으리라. 홀로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절망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는 모두 인터넷과 SNS로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절돼 있다. 인간의 숲 속에서 관계를 잃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이리라. 그래야,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난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홀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존재 의의를 밖에서 찾으라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혼자서도 괜찮아야 한다. 하지만 혼자서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크게 봤을 때 내가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혈혈단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에게는 그 아이가 그런 확신의 대상이다. 노인은 그 아이가 나를 외면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정만 없었다면 그가 나와 함께 와줬을 것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에 아이를 계속 찾으면서도 혼자서 괜찮을 수 있었다. 내게서 행복을 찾기 위해선 남이 필요하다.



늙은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 뭣해. 자네는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없는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라고.

"여러 가지 좋은 충고를 해 주는군. 이제는 그것도 싫증이 났어."

노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강인하다. 혼자임에도 흔들림 없다. 그 이유는 그 아이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 집중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노인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말이다. 가지고 오지 않은 연장을 아쉬워할 시간에 가진 연장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노인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버텨낼 수 있게 해 준다. 더 나아가서는 삶을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정신과 치료(주요우울장애나 불안장애 등)의 궁극적인 방향성은 바로 “Here and Now”다. 말 그대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안이나 우울은 부정적 사고를 동반한다. ‘인지왜곡’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남들보다 부정적인 사인에 집중하고, 머릿속으로 더 부정적 상황을 그린다.


예컨대 친구와 늘 10시 30분에 점심메뉴를 이야기했다 해보자. 그런데 오늘은 친구가 점심 뭐 먹을래?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 왜 오늘은 열 시 반이 됐는데 말을 안 걸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그래, 그럴 거야. 그러니까 같이 점심 먹자는 얘기를 안 하지. 평소라면 진작에 하고도 남았을 텐데! 무슨 잘못을 했을까, 오늘 아침에 인사를 하며 표정이 너무 안 좋았나? 그래, 그거밖에 없어. 내가 그럼 그렇지. 난 잘하는 게 뭘까?’


비약이 조금 들어갔지만, 대개는 저렇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전개해나간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고 회로가 돌아간다. 나는 내 탓을 하지만, 남 탓(여기서는 친구 탓)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사고가 왜곡된 사고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담사는 이를 두고 ‘판타지’라고 했고, 주치의는 ‘(사실이 아닌) OO 씨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현실은 내 생각과는 다르다. 친구는 그냥 바빠서 말하는 걸 까먹었을 뿐이다.


삶과 현실, 타인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정적인 상황이나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 내가 이런 상황이구나.’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그냥 내 현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할 일은 지나간 과거를 곱씹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만 존재할 수 있다. 노인은 이런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인처럼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해답도 역시 거기에 있다.     



"마놀린, 그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졌어."

노인이 말했다.

"정말 놈들에게 지고 말았어."

"하지만 물고기가 할아버지를 이긴 건 아니었어요. 잡아 온 물고기는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렇지, 정말. 내가 놈들에게 완전히 진 것은 나중 일이었어."     


하지만 Here and Now에 집중한다고 해서 꽃길만 열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현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정적인 상황을 ‘아, 내가 이런 상황이구나’ 하고 받아들임에 불과하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상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노인은 스스로 놈들에게 지고 말았다고 선언한다. 대자연이라는 거대한 힘에 노인은 인간의 강인함을 충분히 보여줬다.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결국 대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씁쓸하다. 이런 일은 인간과 자연 관계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런 내용이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괴롭힘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 시국’을 내가 거스를 수 있는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있는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법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테다. 그렇기에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노인만큼이나 강인한 사람마저 결국 패배하고 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세상과 싸워 이기랴! <노인과 바다>의 저자인 헤밍웨이 자신도 우울증과 각종 정신질환에 고통받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생각해보면 Here and Now라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캐치프라이즈는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라는 허무주의에 불과해 보인다. 우리네 삶은 정말로 무의미한 잡초 같은 삶일까? 정녕 우리는 불합리한 세상에 체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이제 우리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다녀요.”

“아니야, 안 돼. 나는 눈이 없어. 더 이상 운이 없는 사람인가 봐.”

“아니, 운이라니요?”

소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소리 마세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운을 가지고 갈게요.”

“너희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상관없어요. 나는 어제 두 마리를 잡았어요. 하지만 아직 더 배울 것이 많아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저랑 같이 나가요, 네?”

“좋은 고기잡이용 작살을 하나 구해서 늘 배에 싣고 다녀야겠어. 아마 고물 포드 차의 스프링 조각을 이용하면 날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과나바코아에 가서 갈아 오면 돼. 아주 날카로워야 한단다. 부러지기 쉬우니까 너무 많이 벼리지는 마. 내 칼은 이미 부러졌어.”     


다시금 노인과 소년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패배를 선언한 노인은 체념하고 더 이상 항해를 나가지 않으리라 이야기한다. 소년은 그런 노인에게 계속 매달려 설득한다. 노인은 다시 마음을 돌려 다음 항해를 준비한다. 이번 경험을 거울삼아서 더 좋은 작살을 구비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노인은 정말 패배한 걸까? 말로는 패배했다고 하지만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내일을 준비한다.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하늘이 준 선물을 무시하지 않았다. 힘들지만 담담하게 현재를 받아들이고 오늘에 충실한다. 내일을 준비하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며칠은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 노인은 바다에 나설 것이다. 언제가 됐든지 바다로 나설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바다에 나갈 것이다. 그러면 노인은 패배한 게 아니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을지 모르나 전쟁에서 패배를 선언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노인은 파괴될 때까지 계속해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할 일을 떠올리며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소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해놓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패배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불합리하고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쓰러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은 불합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삶은 가치 있다.


우리는 죽을 줄 알면서도 산다.     


결국 나는 저놈들한테 지고 마는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이제 너무 늙어서 몽둥이로 상어를 때려죽일 수도 없다. 그러나 내게 노와 짧은 몽둥이 그리고 키 손잡이가 있는 한 끝까지 싸워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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