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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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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Jan 22. 2021

무기력을 위한 변명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우울증 환자의 머릿속

    요즘 나는 다시 무기력의 사이클에 빠져 있다. 몸과 정신에 힘이 없다. 해야 할 일은 있다만 별로 할 의욕은 없다. 사실 이게 정말 해야 할 일인지 확신이 안 서서일 수도 있고, 그냥 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해보면 좋겠다 싶은 일은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쳤던 피아노를 다시 쳐보고 싶다. 그땐 피아노로 부산시 콩쿠르에 나가 상도 받았었다. 새 책도 마구 사서 읽고 싶다. 하지만 그럴 힘과 용기, 여건이 없다. (변명일지 모른다.) 피아노는 학원에 다니거나 빌려야 하는데 그럴 시간과 돈이 없다는 변명이 떠오른다. 새 책을 사서 읽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집에 안 읽은 책이 20권이나 쌓여 있다는 말로 일축한다. 결국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고 느끼는 무기력 상태다. 실제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고 느낀다.


    한 이주일 이어왔던 공부도 이제는 지속하기 힘들다. 한 네 시간 앉아 있으면 체력 방전이다. 교과서 글자가 읽히기는 하는데 도저히 머리에는 안 들어온다. 교수님이 열심히 설명해놓은 글을 한글로는 읽겠는데 뇌에서 "절대 내 뇌를 내줄 수 없다!"라며 교수님의 슈팅을 선방하는 것만 같다. 이런 경험을 30분쯤 하다 보면 아, 내 하루가 끝났구나 하는 한탄이 터져 나온다. 시계를 보면 이제 겨우 오후 두 시다. 하루는 10시간이나 남았다. 하지만 나는 다 끝난 것만 같다.

    게임을 해도 유튜브를 봐도 쉬는 기분이 아니다. 머리를 계속 돌리기 때문이다. 멍을 때리거나 독서, 산책하는 것이 훨씬 나은 휴식이라고 의식은 하지만 그럴 힘이 없다. 그래서 이도 저도 못하는 채로 잠이 들 때까지 일어난 것도, 앉은 것도 그렇다고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이부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휴식이 될 텐데, 머릿속에서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나를 향한 자책, 그리고 자기 방어로 쉴틈이 없다. 전문가의 표현을 빌리면 불안을 처리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려서 힘이 없는 상태다.


    슬픈 사실은 내 머릿속 변호사는 검사에게 매일 진다는 거다. 처음에는 변호사가 이길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치료와 병원을 다니며 생각이 바뀌었다. 내 변호사는 나를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 매일 검사와의 싸움에서 지고 나를 탓하게 된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부모의 극성이 과한 잔소리와 간섭이 돼 자식의 삶을 힘들게 만들듯이, 내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너무 아낀 나머지 나를 변호하는 것보다는 함께 내 행동을 책망하고 있었다. 

아니, 무기력이 덮칠 때는 바로 일어나서 뭐든지 하는 게 답인 걸 알잖아요? 알면서 왜 무기력에 잠식당하고 있어요.. 정말 탓하는 게 아니라 이메다 씨가 안타까워서 그래요. 너무 안타까워... 

    그리고 나는 거기에 주눅 들어서 변호사에게 혼날까 눈치를 본다. 솔직해지지 못한다. 변호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소송에서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 머릿속 검사에게 패소하고 끝없는 자책의 구치소에 갇혀 출소할 희망마저 잃어버린다.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맘 편히 쉬지도 못하고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할 힘도 용기도 없다. 그렇기에 Just do it을 하지 못한다. 머릿속의 불안을 처리하고 자책 속에서 미력한 자기 보호를 하느라 그럴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순환이 반복됨 또한 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 악순환의 반복을 깨닫고 다시 나를 자책한다. 그렇게 내가 20여 년을 살며 쌓아온 부정적 사고 패턴만이 반복된다.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괜찮다, 괜찮다. 못해도 괜찮다, 불안은 자연스러운 거다 하며 달라지는 것이 상책임을 알지만, 내 변호사는 내 상담사처럼 자애롭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일어날 힘이 없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논리의 온도는 너무나 낮아서,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닿으면 사람의 마음은 꽁꽁 얼어버린다. 가장 뜨거운 논리마저도 가장 차가운 마음에게 가슴 시림을 선사할 수 있다. 논리라는 이름 앞에서 감정은 어떤 창도 막지 못하는 방패가 된다. 이는 사람들이 타인의 일을 접할 때 잘 일어나는 일이다. 의 감정을 100% 이해할 수 없으므로, 조금의 감성과 대부분의 이성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슬픈 사실은 그런 조언이라는 탈을 쓴 책망에 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도 이성적인 동물이고, 내 행동이 논리적으로 잘못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드도 내린 채 상대의 잽을 얻어맞는 수밖에 없다. 더 슬픈 사실은 이런 일이 매우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 변호인이 나를 사랑해서 나를 책망하듯, 나를 걱정하는 주변인의 충고나 조언이 나에게는 책망과 공격으로 들릴 때가 많다. 알면서도 못 하는 것이 문제인 사람에게 이미 아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만큼 잔혹한 일은 없다. 불면증 환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말은 마음 편히 먹고 푹 자 라는 말이다. 그게 안돼서 문제인 건데, 맘 편히 먹어야 하는 걸 어느 환자가 모를까?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 목발 짚으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데 왜 안 걷고 병상에 누워 있어? 라는 말은 이치로는 맞는 말이지만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가장 슬픈 것은, 이런 일이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 자식 관계,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매우 자주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라 무기력이다. 나 자신과 싸우느라, 내 불안과 싸우느라, 내 완벽주의와 싸우느라 아무 힘이 없는 거다. 해결책은 무기력에 휩싸여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중요한 건 해결책이 아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용기다. 무기력과 자학 사고를 알아채고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일은 굉장히 괴롭다. 하지만 수십 년을 반복해온 이 패턴에서 벗어나는 일은 더더욱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해결책을 행해야 한다. 그래서 내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채찍질은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에게 두려움을 얹어봤자 좋은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성과 논리보다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내 머리가 더 꽁꽁 얼어버리지 않도록 나의 슬픔을 이해하는 타인의 슬픔이 필요하다.


    오늘은 밖에 나와서 이렇게 글을 쓴다. 아쉬움이 더 많다. 퇴고 하지 않고 바로 올리는 글이라 더욱 그렇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내 불안을 쓰고 있다보니, 교육철학 글은 언제 쓰지, 설민석 글은 언제 쓰지 하는 불안과 자책이 엄습한다. 하지만 애써 눌러두며, 아니 이런 불안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나를 다독이면서. 무기력에서 빠져나온 내가 자랑스럽다면서. 오랜만에 저장 대신 발행을 누른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잘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거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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