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쁜 날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메다 Dec 21. 2020

안 괜찮은 나의 안 괜찮은 이야기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어제는 굉장히, 죽고 싶은, 하루였다. 정확히는, 더 이상, 살기 싫은, 일주일, 이주일, 삼주일, 한 달의 연속.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해야 하는데, 할 일이 있는데, 하고 싶은데, 하지를 못하겠다. 머리가 멍하다. 몸이 무겁다. 그냥 이 상태로 죽고 싶다. 고통 없이, 제발. 그런 생각을 했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괜찮아> 책 소개글
괜찮은 사람의 안 괜찮은 이야기 (brunch.co.kr)

아래부터는 이 책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늘 독후감을 올리며 그래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내 감정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내 '머리'가 써낸 글이라면 오늘은 내 '마음'이 써 내려가는 글이다.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던 이유는 동질감이다. 엘리너의 모습에서 내가 너무 많이 비쳤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최대한 헤아릴 수 있었다. 당연히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기보다는 너무나 안쓰럽게 비쳤다. 슬펐다. 그녀의 노력이, 그녀의 삶이, 그녀의 인생 하나하나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읽는 내내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엘리너가 자살을 생각하는 장면이 참 인상 깊었다.


궁금했다. 나는 어디에 쓸모가 있지? 나는 세상에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취한 것도 전혀 없었다. 내가 존재하기를 그만둔다 해도 어느 누구에게 어떤 물질적 차이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그 부재를 느낀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지만 불을 켜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보고 싶어하거나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다. 이것은 그저 사실의 진술이다.
나는 평생 죽음을 기다려왔다. 적극적으로 죽으려고 했다는 말은 아니고, 그저 정말 살아 있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제 뭔가가 달라졌고, 나는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병의 마개를 따서 쭉 들이켰다. - 338


덧붙일 말이 뭐 있을까? 내가 매일 아침마다, 점심마다, 특히 밤마다 하는 생각이다. 눈을 뜰 때나 눈을 감을 때나 휴대폰을 확인할 때나 게임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쉬지 않고 내 머릿속에 들이닥치는 생각이다. 정말, 덧붙일 말이 없다. 오늘 내가 자살한다면 유언장 대신 책의 338페이지를 찢어놓으면 충분할 테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힘든 생각이다. 진동 한 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볼때면 참 허망하다. 그런 세상 속에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너무 버겁다. 늘 공허함과 절망감이 나를 감싼다.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했던 이들 몇몇은 나를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울하구나'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전혀 우울하지 않다. 늘 공허하고 절망스럽고 무기력하고 무가치감에 빠져 살뿐이다. 나는 전혀 슬프지 않다. 그냥 삶을 충실히 살아갈 용기도 힘도 없는 상태다. 늘, 혼자라고 느껴지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기에 내게 삶은 고통이다. 정말 죽지 못해 살아간다.

나는 평생 죽음을 기다려왔다. 적극적으로 죽으려고 했다는 말은 아니고, 그저 정말 살아 있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살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고 임세원 교수님의 책처럼,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만 더 이상 살기 싫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왜, 살기 싫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살고 싶어 한다. 죽음을 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시궁창이기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만, 그 개똥밭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살기 싫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빠져나가고자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있지만 도저히 끝이 안 보인다. 도저히... 개똥밭에 살기는 싫다. 언제나 개똥밭에 살기는 싫다. 나도 잘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걸 알기에 나는 죽고 싶다.


내 문제는 다양하다. 그리고 나는 내 문제를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정확히는 혼자 남는 것,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간관계 욕구가 있음에도 버려질 걸 두려워해 인간관계를 피한다. 또 완벽해짐으로써 이 불안을 극복하고자 한다. 감정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올라오면 상황을 최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파악해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한다. 늘 감정을 억제하고 내가 배운 이성과 논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감정 표현이 서툴고, 억눌려 있던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나를 논리적으로 비난한다. 비난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어쨌거나 나를 공격한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내가 아는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예기불안이나 관계사고, 유기불안이 굉장히 강하고 불안정한 혼란형 애착을 가지고 있다. 강박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방어기제로는 주로 주지화를 사용한다. 내부귀인 성향이 강해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이다.


이 길고 긴 설명보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나 스스로를 설명하자면, 나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다. 감정이 올라와서 장광설을 죽 늘어놨으나, 사실 독자들이 이걸 알 필요는 없다.(애초에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조금 더 세부적인 부분을 살펴보겠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소유한 순간부터 이미 조금씩 사라져가는 이슬 같은 것이다. 그렇게 살면 힘들 것이다. 늘 자신에게 그 이상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사람들이 겉모습 이면을 봐주길 바라는 것. 황홀한 몸과 반짝이는 눈과 숱 많고 윤기 흐르는 머리칼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것. -45


내 핵심 감정은 불안이다. 버려지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는 해결책으로 완벽해지는 것을 택했다. 어렸을 적에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원하지 않던 경험을 한 적이 두어 번 있다.(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은 "@@씨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런 안 좋은 경험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더해서 안 되는 것까지 다 통제하려는 성향을 갖게 된 건 아닐까요?"하고 이야기했다. 정말 이유가 그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기능적으로 완벽해지고 모든 상황을 통제함으로써 안정감을 느끼고 그렇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실은,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서, 키가 커서, 성실해서, 계획성이 철저해서 칭찬받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런 칭찬을 들으면 나는 기분이 나쁘다. 저런 것들은 모두 내 노력의 영역보다는 '운'의 영역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담사는 이것을 '기능하는 나'라고 명명했다. 나는 기능하는 나보다는 그저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다. 내 결과보다는 과정을, 성취보다는 노력을, 내 겉모습보다는 나라는 사람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아내고자 한다. 물론, 기능하는 나도 나임을 안다. 내 존재 이유를 인정하는 사람이 분명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걸 내가 애써 외면하며 새로운 이유를 찾아내고자 함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쉽지 않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쉬운 문제지만, 나는 여기서 벗어나기 어렵다.


"(......) 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야. 신뢰를 주지 않는 사람. 실패한 사람. 오, 그래.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그리고 네가 어떻게 끝날지도 알고 있어. 잘 들어. 과거는 끝나지 않았어. 과거는 살아 있는 거야. 네 아름다운 흉터, 그건 과거에 만들어진 거지, 안 그러니? 그리고 그건 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여전히 살아 있어. 여전히 흉터가 아프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오, 아프겠지. 아프다는 거 알아. 그 흉터가 어쩌다 생긴 건지 잊지 마, 엘리너." -172


이는 엘리너의 어머니가 엘리너에게 전화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늘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다.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실패한 사람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내가 어떻게 끝날지도 안다. 남들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얘기하지만, 내게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현재이다.


나도 안다. 과거에 만들어진 흉터는 흉터일 뿐, 여전히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는 걸. 흉터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잘 안다. 누가 뭐라고 안 해도, 의사나 상담사가 씨부리지 않아도 잘 안다. 아는데, 도저히 멈출 수 없다.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살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삶이란 죽음을 향한 여정이니 죽어간다고 해도 괜찮겠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다시 책을 읽던 나의 감상으로 돌아가면, 나는 엘리너가 보이는 사회성 없는 모습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 저건 좀 심한데? 많이 이상한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말미에는 '아, 누군가도 나의 행동을 보며 이상하게 바라보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 엘리너에게 연민을 가졌음에도, 나를 연민으로 바라볼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 불안해졌다.


엘리너가 치유받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불안했다. 나도 엘리너처럼 될 수 있을까? 내게도 그럴 용기가 있을까?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내게도 레이먼드 같은 친구가 생길까? 오만 의문이 들었다. 사실 질문의 형태를 띤 비난이었다.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다시 마음이 쳐졌다. 절망스러웠다. 엘리너는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결국 용기를 잃지 않고 해냈는데 나는 뭐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용기를 얻기보다는, 살기 싫었다. 엘리너처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던 시간을 돌이켜 생각했다. 우리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 용기를 내서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힘을 내, 엘리너. 내가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용감해져야지. 전과는 상황이 달라. 비슷하지도 않아. 이 아이는 고양이고 너는 성인 여자야. 네 능력은 충분하고도 남아. -404


나도 상담을 받고 있고, 다행히 의사도 약만 처방하는 의사가 아니다. 불행히도 긴 상담시간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짧지만 갈 때마다 10분에서 20분 정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상담사와 하는 1시간짜리 상담도 큰 힘이 된다. 분명 나는 병원과 상담에서 내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패턴을 찾아보았고, 상황을 합리적으로 깊이 생각해봤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상담실에서 나와서, 진료실에서 나와서 내 자리로 돌아가면 그 이야기를 했던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엘리너처럼 용기를 내고, 배운 것을 적용시키지 못한다. 그 사실이 나를 절망스럽게 만든다. 엘리너의 이야기는 내게 용기를 주지 못한다. 더 큰 절망감을 가져다준다.


'나는 왜 알면서도 그렇게 못할까?'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비난임을 알면서도 그 비난을 멈출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되죠?" 내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 좋아지고 싶은 욕구, 살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절박하게 말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죠? 내가 나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죠?"
닥터 템플이 펜을 내려놓고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그러고 있어요, 엘리너. 당신은 스스로 평가하는 것보다 더 용감하고 더 강해요. 그렇게 계속해나가면 돼요." -429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끝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지고 있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느리지만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실제로 어떻든 간에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진흙탕에 빠져 있다.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발버둥을 의사와 상담사는 '잘하고 있다'라고 하지만, 많이 빠져나왔다고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난 정말 밖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오랜만에,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을 써본다. 정말 내 솔직한 독백을 써본다. 내일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의사가 날 위한 마법 같은 약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내일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의 위로가 비난으로 느껴진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