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4
책방에서 맞이하는 첫 여름이다. 바야흐로 여름이다.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6월이다. 초여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여름이 된 것 같다. 책방에는 작은 에어컨이 있다. 왜 원룸에 있을 법한 그 작은 에어컨 말이다. 제주로 간 서실리책방 사장님이 두고 가신 에어컨이다. 주말에만 나오는데도 에어컨을 내내 틀고 있을 깡이 없다. 손님이 없을 적엔 잠시 끄고 있고 싶다. 하지만 손님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시원한 공기를 순환시킬 필요가 있다. 정답은 선풍기! 선풍기를 들여놓으려다 여름이 아닌 계절에 마땅히 보관할 공간이 없어 구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점에 놀러 온 다른 책방 사장님이 벽걸이 선풍기를 달면 되지 않냐는 현답을 주셨다. 찾아보니 공간에 어울릴만한 벽걸이형 선풍기가 있어 구매하기 전 설치 방법을 찾아봤다. 전동드릴이 필요하다. 책방에는 없는 도구다. 아니면 낮은 선풍기를 올려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선풍기에 대한 욕구는 이미 시작되었고 검색 끝에 괜찮은 가격에 선풍기를 찾아 고민없이 결제했다.
결제하고 우연히 중고 물품에 관련 글을 보았다. 중고 물품을 사는 행위가 돈을 아낌과 동시에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아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는 글이었다. 당근마켓에 선풍기를 검색해보았다. 내가 주문한 제품과 같은 선풍기가 올라와 있다. 댓글도 달려 있지 않다. 이건 운명이다. 게다가 판매자는 책방과 가장 가까운 역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짧은 대화 끝에 서점을 잠시 비우고 선풍기를 거래하러 나갔다. 그야말로 쿨거래다. 역 앞 파출소에서 만나 돈과 선풍기를 교환하고 판매자가 돌아가는데 서점 가는 길이다. 그런 줄 알았으면 더 가까운 곳에서 만날 걸 그랬다. 어느 순간 판매자가 보이지 않는다. 서점에 도착해 간다. 새로 사지 않고 중고로 사 치킨 한 마리 값 정도를 아꼈다. 첫 당근 마켓 거래였는데 판매자에게 친절하고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매너 구매자 평을 받았다. 칭찬 받으니까 더운 기분이 시원해졌다.
선풍기를 어디에 둘지 이리저리 고민하다 별 수 없이 콘센트 가까운 곳에 두었다. 그곳에 두었던 장식장과 책은 다른 곳에 자리를 옮겼다. 선풍기가 회전하는 게 꼭 생명이 있는 것만 같다. 나 빼고 움직임 없는 물성을 지닌 것만 가득한 곳에 성실히도 움직이는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책방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온다.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도 틀었다.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다 좋아하는 책에 책방을 그려준 엽서를 꽂았다. 어제 엄마가 책방에 와 지인들에게 선물한다며 여러 권의 책을 골라 달라고 했다. 오늘은 그 책들을 포장했다. 원래는 택배를 안 하지만 가족 특권이다. 이 책을 판 돈으로 올여름 전기세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딱 그 정도의 전기세만 나왔으면 좋겠는데, 또 몇 권을 더 팔면 선풍기 값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시원한 책방에서 좋아하는 책에 책방을 그린 엽서를 꽂아 넣는 순간, 당분간 여름이 올 때마다 떠오르는 순간이 될 것 같다.
더위에 녹아 내린 듯이 자세를 잡은 이웃 책방 프루스트의 고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