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쿤 치앙마이 1 - 블루투스 키보드의 배신
여행 전날 밤까지 고민스러웠다.
노트북을 들고 갈지 말지.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의 조합이면 버틸만할 것 같았다. 숙소에 도착해 키보드를 연결해본다. 여행 첫날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깜박깜박 불이 들어오면 금세 연결되던 키보드가 먹통이다. 아예 깜박 거리 지를 않는다. 최대 2년을 버틴다던 건전지는 1년도 채 쓰지 않은 상태다. 혹시 모르니, 숙소의 티비 리모컨 건전지를 빼 갈아 끼워본다. 노트북을 두고 온 걸 잊고서 가져온 마우스의 건전지도 넣어보지만 여전히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키보드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방법을 찾아본다. 그때 처음으로 이 키보드에 전원 버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껐다 켜 본다. 애석하다. 아무 신호 없는 키보드는 답답하다. 공항에 내려 택시를 찾아 헤맸던 순간처럼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는 안 그랬으면서, 위탁 수화물도 아니고 일부러 기내에 태워 온 키보드인데. 가까운 쇼핑몰인 마야몰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파는지 검색해보니 지금 쓰는 키보드와 같은 키보드를 팔고 있다고 한다. 마야몰에 갔다. 키보드를 찾을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사는 비용보다 비싸다. 키보드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키보드 없이 기록하려니 짧은 기록밖에 남지 않는다. 아이패드에 펜슬로 쓰는 글은 꾸준하지 않고, 일기는 짤막하고 영상은 텍스트 비중이 적다. 쓰고 싶은 글감을 메모장에 기록해두고 한국에 가서 쓰기로 했다. 여행 후 기억을 되짚어보는 일도 의미 있다.
첫 번째 숙소의 마지막 날. 무용지물인 키보드는 이곳에 놓아주기로 했다. 함께 여행 온 친구가 버릴 거냐고 재차 물어보더니 냅다 내리친다. 순간 박살이 난 듯한 키보드가 건전지를 뱉어 냈다. 친구가 많이 심심했나 보다. 보는 둥 마는 둥 짐을 챙기는데 키보드가 켜진다고 한다. 설마? 거짓말하지 말라며 키보드를 가져가 블루투스 키를 눌러보니 진짜 깜박거린다. 아이패드와 연결이 된다. 메모장에 글이 써진다. 엄마야. 친구가 기계는 때려야 한다고 하는데 나도 물론 때려봤다. 때림의 강도가 약했던 것이다. 여행 2주가 지난 지금 처음으로 키보드를 써 본다. 여행 3일이 지났을 때쯤 보조배터리도 충전이 되지 않다가 갑자기 다시 충전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장 난 물건 없이 첫 번째 숙소를 떠났다. 디지털 노마드에게 기계 고장은 없던 계획도 망가뜨리는 사건인 것이다. 블루투스 연결이 불안정하다거나, 헤드셋을 놓고 왔다거나, 와이파이가 없는 카페에 갔다거나... 디지털은 한 순간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한다.
문득문득 키보드를 침대에 내리치던 친구의 스윙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컵쿤 치앙마이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