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쿤 치앙마이 - 탱고의 기억
왼쪽 팔 접히는 공간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로, 실패를 두려워해 작은 목표를 선호하는 나에게 좋은 조언 같아 몸에 새긴 문장이다. 자빠지면 자빠진 대로 좋다. 탱고를 춰 보지 않았지만 탱고는 그런 춤이구나. 막연한 동경을 가지다가 탱고를 출 기회가 생겼다. 치앙마이 원님만 쇼핑몰에서는 요일 별로 다른 무료 클래스가 열린다. 수요일은 탱고 수업이 열리는 날이다. 저녁 8시부터 9시 반까지 열리는 탱고 수업. 1층 야외 혹은 3층 강당에서 열린다. 1층을 기웃거리다 시간이 가까워져도 시작하지 않자 3층으로 올라가니 사람들이 모여 있다. 수업이 이미 시작한 듯 보이면서도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라 친구들과 망설이고 있는데, 알고 보니 탱고를 몇 번 춰 본 사람들의 수업 시간이었고 비기너를 위한 수업은 아직이었다.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스텝을 밟는 것부터 시작한 수업은 파트너를 지어 호흡을 맞추는 걸로 이어졌다.
나의 첫 파트너는 조금 중국인 같아서, 마스크를 벗고 춤 추는 시간이 살짝 겁이 났다. 최대한 입을 벌리지 않으면서 추는데 당연하게도 스텝이 꼬인다. 나는 리더가 아니라 팔로워인데 자꾸 리드를 한다. 평소 자기주장과 고집 센 성격이 춤에서도 드러난다. 상대방에 리듬에 온전히 나를 맡기는 게 어렵다. 맞잡은 손에서 땀이 잔뜩 나 축축함을 느낄 무렵, 그 중국인 같은 남자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입을 크게 벌리기 싫어서 옹졸하게 코리아라고 답했더니,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가 영어를 썼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한국인이었다고? 사실 그 남자는 낮에 길을 걷다가 마주친 적이 있다. 한국인이 흔히 쓰는 마스크가 아닌 퍼런 마스크를 써서 중국인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입에서 고국의 언어가 나오는 순간 긴장이 풀렸고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중국인과 접촉해 역병에 걸렸다는 오명은 벗을 수 있겠구나. 그는 여자 친구와 함께 왔다고 했다. 그의 여자 친구는 수업이 시작할 쯤 고급반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다른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아마 짝을 맞추려고 그런 것 같았다. 내 친구도 어느 순간 고급반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만 스텝이 꼬이자 그는 리듬을 맞추는 것부터 하자고 했다. 춤을 추기 전 둠칫 둠칫 왜 몸을 흔드나 싶었는데 파트너와의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인 걸 그제야 알았다. 말도 통하고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갑자기 내 신세한탄까지 털어 놓는 순간 파트너를 바꾸라고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마자 하지 말 걸 후회했는데 잘 됐다.
다음 파트너는 서양인 남성이다. 그는 나를 힘으로 끌고 가서 겨우 긴장이 풀렸던 몸이 경직되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얼른 파트너를 바꿔 주었으면, 다음 파트너는 잘 웃는 서양인 여성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그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의 끝 자리만 알려주었다. 그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도 나도 탱고는 처음이어서 서툴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리더 자리를 넘겼는데 또 내가 리드를 하는 바람에 그는 나에게 리더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민망했다. 리더를 하니 훨씬 편해졌다. 스텝이 꼬이면 웃음이 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미소는 어렴풋 그려진다. 그와도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고, 이번에는 친구와 짝이 되었다. 친구는 누구보다도 힘으로 리드했고 그 모습에 큰 웃음이 났다. 웃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모를 상태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갔다.
스텝을 다 배우고 짝을 지어야 하는데 친구와 내가 낙동강 오리알처럼 남았다. 우리는 둘 다 팔로워 스텝을 배워서 리더가 없으면 안 되는데, 리더를 기다리라는 선생님의 말에 내가 먼저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탱고는 우아한 춤이라고 했다. 우아한 춤을 춰도 땀이 나는구나. 한 시간이 넘어가자 체력이 바닥나고 또 어떤 새로운 사람과 춤을 춰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춤을 즐기는 사람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슬그머니 왼쪽 팔의 타투를 만져본다. 친구들은 다음 스윙 수업과 살사 수업도 간다는데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른다. 스텝이 꼬이든 말든 시작하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는 것. 탱고는 한 번 맛보고 다시 먹지 않을 아이스크림으로 남았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우아해지면 다시 탱고를 춰보자.
굳은 나를 붙잡고 춤을 춰준 모든 파트너들 컵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