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잔상은 아니고, 감회에요

원래 나와 마주친 순간. 나중엔 이것도 잔상이겠지?

by 김이나

죽기보다도 하기 싫었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위에서 찍어내린' 케이스로라서 했어야 했다. 당위성도, 명분도, 구실도 찾을수 없었던 프로젝트 기획이었고 실행단계도 그려지지 않고 내 밑의 직원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암튼, 하기 싫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찍혀내려온 일'이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게 내 인생의 가치관과 미래까지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이여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와 함께 일할 직원을 뽑고, 사무실을 세팅하고 프로젝트의 KPI를 잡아나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일이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근무시간이 아니여도, 휴가여도 나를 필요로 하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 상사였다. 내 상사는 '사무실이 아니여도' '근무시간이던, 그게 아니던' '너의 목표만 성취해라' 는 주의였다. 평소에 내 스케쥴과 컨디션, 사업 현황, 심지어 개인 일정도 고려해서 근무 시간과 집중도를 조정할 수 있었고 그 작은 경험들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다' 는 효능감이 되었다. 그 프로젝트는 내가 했던 그 어떤 일보다도 성과가 좋았다.


그 프로젝트 이후, 이직을 했고 지금은 아주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목표는 명확하게 있지만, 그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이 명확하지 않은 일.. 내가 그 과정을 만들어가야 하지만,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경력직으로 이직을 해서 그런지,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는 식의 조직원들 시선이 강했다. 입사 초기, 새로운 회사의 예산구조를 몰라서 한참을 헤맨적이 있었는데..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단순한것이었고, 그때 이 건으로 고생하던 나를 왜 선배들은 가르치지 않았을까..왜 내가 혼자 극복하는지 두고만 봤을까 원망스럽다. (사실 지금도 선배들이 막 가르쳐주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각개전투하듯 일을 하면서, 많이 지쳤다. 정말 많이.

개인적으로 최근에 큰 수술을 하게 되면서 일과 사람에 대한 환멸도 느끼기도 했다. 단순히 근무 시간만 채우고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고, 외부 미팅 등 귀찮은 일은 피했다. 업무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은 안한지 오래다. 그냥, 다닐만큼 다니고 그만두지뭐..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상사가 연락이 왔다. 주말이지만 사안이 급해서 그러니 이것좀 처리해달라는..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하필 나는 오늘 남편이 당직근무라 1박2일을 꼬박 독박 육아다. 게다가 하필 오늘 아이가 낙상을 하는 바람에 이마가 찢어져서 저녁에 난리였다. 관내 응급실, 야간진료병원마다 전화를 했지만 소아는 받지 않거나, 외상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119에 전화해서 4개 도시의 응급실을 다 연결했고, 다행히 아이를 받아주는 병원을 찾았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였고, 치료를 받고 복귀하는 길에 상사의 연락을 받았다.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오늘 근무시간이 끝났고,

남편도 없고,

아이도 다쳤고,

꼭 나한테 이 일을 시켜야 하나...저녁도 못먹었는데...


귀가 후,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운 뒤 밤 11시가 넘어서야 노트북을 켰다. 업무 요청이 시작된 곳은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배가 있는 부서.. 의리 차원에서라도 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에 시작했다. 그러자 내 마음이, 과거 나의 본캐와 마주했다.


일을 펼치고 보니, 내가 가장 잘 할수 있는 일이었고 내가 하면 누구보다 효율이 나는 일이었다. 갑자기 즐거운 마음에 일을 하기 시작했고 억울한(?) 마음 없이 일이 끝났다.


과거의 나와 마주했다.


과거의 나는, 누구보다도 내 일에 진심이었다.

내 프로젝트에 한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개인 일정을 존중 받은 만큼, 개인 시간을 희생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반짝였으며, 생기있었다.

내 삶의 활력은 나 자체였다.

그 결과, 누구보다도 큰 성과를 냈고 그 임팩트는 아직도 여전하다. (내가 하던 일은, 국제개발협력이었다)


갑자기 치고들어온 일 덕분에, 과거의 나, 결국 내 본캐였던 그때로 잠시 돌아갔다.

아주 잠시, 돌아갔다.

바라건데, 앞으로 내 본캐를 회복하고 싶다.

나는 내 일을 통해서 반짝이는 그런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지금은 너무 암흑이지만, 곧 찬란한 날이 오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다시 온다더니, 진짜 와버린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