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에서 내려온 후 저녁은 황리단길에서 먹었다. 황리단길이란 경주 황남동을 말하는데, 이태원의 경리단길처럼 핫하다는 뜻이다.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것이 다른 유명한 유적지보다 이 황리단길에 사람이 열 배는 많다. 여기서 우리는 십원빵을 비롯한 군것질거리들을 맘껏 사먹고 앞에 30팀이나 대기한 식당에 웨이팅을 걸고 기다렸다. 어디 얼마나 맛있나 보자!! 벼르는 맘으로 먹어 보았는데 정말 맛이 있었다. 흡족하게 배를 불린 후 기분이 좋아진 채로 부지런히 동궁과 월지를 보러 이동하였다.
경주 유적은 야경이 찐입니다.
신라 왕궁의 별궁이었던 동궁의 터,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
이 동궁 터는 1960년대에 발굴되었으며 그 전에는 연못에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들어 놀았기 때문에 안압지라고 불렸다. 안압지도 좋지만 달을 좋아하는 나는 '월지'라는 이름이 너무너무 좋다.
사람은 정말 너~~~무 많고, 열 중에 아홉은 설명이나 구경보다는 사진에 치중하였다. 우리도 뭐 그 아홉 중에 하나이긴 했다. 사실 예전에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양, 유적지에 사람이 너무 많거나 와서 사진 찍는 데만 치중해 있으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역사 유적에 관심을 보이면 너무 좋다.
자연의 시간이 흘러 옛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 터에서 새 시대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건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일이다. 이게 '역사'의 매력이 아닐까?
밤이 깊어질수록 인파는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밤 10시가 마감이니 그때까지는 모두 나가시라고 꿋꿋이 방송이 계속 나왔다. 말 잘 듣는 우리는 인파를 헤치고 10시 10분 전에 모두 나와 밖에서 아련하게 월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최후의 일각까지도 월지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10시가 되자 얄짤없이 불이 다 꺼진다. 그 단호함이라니, 월지가 더 좋아진다.
돌아나오며 본 첨성대도 야경이 더 예뻤다. 아무리 봐도 저기 올라가서 별을 볼 정도의 높이는 아니지 않나, 부터 시작해서 또 시작된 토론. 우리의 토론은 언제나 우리 맘대로 하는 재해석이지만, 괜찮다. 그것도 '역사'라고 역사학자 누군가가 그랬었다!
다음은 내가 가장 끄덕이게 된 학설이다.
첨성대 윗면은 우물 정자로 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북극오성의 정기를 받은 우물에서 제왕이 난다고 믿었다. 첨성대는 제왕(선덕여왕)의 정통성을 위해 제작된 것이며 사람이 별을 본다는 관측의 의미가 아니라, 우물이 별을 바라본다는 의미인 것이다.
역사적 장소에 오면, 과거의 모습이 어땠을까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를 상상해보는 묘미가 끝내준다.
번쩍, 눈을 떴다.
내가 언제 잤더라..? 첫째 날 밤과 달리 둘째 날 밤은 기억도 없이 쓰러져 잤나 보다. 일찍 체크아웃을 준비하고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예상보다 빠른 퇴실에 급하게 준비하셨는지 70대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은 우리에게 불가리스 요구르트를 하나씩 안겨주셨다. 마트 갔다가 사온 거라며. 그 마트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친숙하고 정겨운지! 요즘 감각으로 예쁘게 꾸며진 숙소는 아니었지만 우리 할머님처럼 챙겨주신 온정에 너무나 따뜻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무덤뷰 아침식사. 황리단길에 있는 이 브런치 카페는 분명 엄청 인기가 많을 만한 곳인데, 오픈하자마자 왔더니 카페 이름처럼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빠르고 남들과는 다르게 아침을 해치운 후 도착한 곳은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동 마을. 이곳은 조선시대 양반 집성촌으로,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보존도 잘 돼 있을 뿐더러 마을 자체가 너무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데 모두 황리단길에 있는지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너무나 좋았던 것이, 우리의 수다만 빼면 들려오는 건 다양한 새 소리뿐이었다. 보이는 것은 기와집, 초가집, 옛날식 냇가와 우물. 타임머신 타고 그대로 조선시대에 온 것만 같았다. 지구온난화 걱정에 살짝 울적해질 정도로 초여름 수준으로 더운 날씨에 살짝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떠나기 전부터 했다. 그만큼 정말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마을 출신 유명인으로 문묘에 종사된 성리학의 거두, 회재 이언적 선생이 있다. 그의 생가와 사당 등도 조용히 구경해볼 수 있다.
마을 안에는 무려 1909년에 세워진 양동초등학교가 있다. 기와로 지붕을 덮어 두었는데 너무나 고풍스러웠다. 담벼락에는 여느 학교가 그렇듯 학생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양동마을에 살고 있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글이나 역사 의식이 드러나는 글들이 많았다. 7세 고시니 뭐니부터 시작해서 초등학생조차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시달리는 이 시대에, 이런 자부심과 의식을 배우며 자라나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아서 우리는 한참 들여다보았다. 진정한 교육, 진정한 명문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다시 황남동으로 돌아와 대릉원을 가려는데 주차난이 극심하였다. 역시나 사람들은 황리단길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황남빵 파는 가게 건물에 무심코 세웠다가 관리인에게 한소리 듣기까지 하고 날은 점점 더워지고, 나약한 심신은 짜증 버튼을 누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좀 시원해져 볼 겸 돈 내고 천마총 안으로 쏙.
천마총은 돌무지덧널 양식으로 유명한 신라의 무덤으로, 주인은 누구이지 알 수 없지만 내부에서 천마도라는 그림이 나왔기에 천마총이라고 불린다. 실제 무덤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덤 내부를 잘 구현해두었을 뿐더러 다양한 자료와 사료를 통해 신라의 특성을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시원하고.)
이 대릉원 안에는 목련 포토존이라고 유명한 스팟이 있다. 왜 내 무덤 앞에서 이 난리들인가 싶을 뉘신지 모를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큰 무덤들 사이에 나무가 몇 그루 있어 사진을 찍으면 엄청 아름답게 나온다. 가족, 커플, 친구 단위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위해 웨이팅까지 감수한다. 그러나 지친 우리는 웨이팅을 감수할 수 없었다.
여기서 찍어보다가
이렇게 찍어보는 등 각종 묘수를 부렸다. 실제 포토존 위치보다는 안 예쁘게 나왔겠지만 줄은 안 섰으니 만족했다. 이렇게 나름 사진까지 건지고 황남빵까지 바리바리 사 들인 후 기차를 타고 다시 훌쩍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2박3일간 이리저리 찍은 사진과 영상들을 정리하고, 사들인 물건들도 정리하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다음날 출근을 생각하니 힘이 빠졌다. 결혼 준비를 한참 하고 있었어서 성격적으로도 예민하고 쉽게 피로해진 시기였기에 주말 동안 쉬지 못한 타격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공기의 냄새와 무게마저 생생하게 기억나는 한 순간 한 순간들은 나를 좀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좀더 알게 된 사람, 우리 땅을 좀더 밟아 본 사람, 땀흘리며 걸어다닌 사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누린 사람!
이것이 역사 답사를 꾸준히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