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해(2023)에는 무려 네 번을 다녔는데, 작년에는 경주 답사 한 번으로 그쳤던 우리의 답사. YG쌤이 학교를 옮기시기도 했고, 내가 결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었다. 올해는 MZ쌤까지 다른 학교로 옮겨 모두 흩어지게 되었기에 더 요원해질까봐 나는 2월에 답사를 가자고 제안했고, 역시 빠른 응답이 돌아왔다.
날짜는 새 학기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이후로, 그리고 장소는 아직 함께하지 않았던 경북 지역으로 정했다. 여러 번 함께한 경험으로 이 정도 논의는 카톡 몇 번이면 금방 끝난다.
2월 20일, 판교역에서 YG쌤의 차에 올라탔다. 칼바람이 귀와 코를 때리다가 차에 올라타자 후끈한 공기가 감싸주었다. 겨울 역사 답사는 처음이라 이 매서운 날씨에 당황하였다. 그래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좀 낫지 않을까? 기대하며 MZ쌤까지 태운 후 문경으로 훌훌 '내려왔다'. 분명히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더 춥구나.
안동은 다른 선생님들이, 그리고 문경은 내가 제안했다. 태조 왕건이 국민 사극으로 인기를 끌고 있던 2001년 초, 그때부터 이미 '사극소녀'였던 나를 위해 부모님이 문경에 있는 태조 왕건 촬영장에 데리고 가 주셨다. 너무 어릴 적이라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컴컴했고 나는 차 뒷자석에서 자고 있었다. 앞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몇 번 들린 후 촬영장이 이미 문을 닫았다며 가야겠다는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다른 추억은 2004년 겨울, 성당에서 복사단 캠프로 갔던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신발이 다 젖도록 눈을 자박자박 밟으며 한참 길을 따라 걸었다. 겨울 피정이라고 챙겨 입은 외투와 젖은 신발이 무거워 그저 앞사람 발만 따라 한참을 걷고 나니 인솔하시던 수녀님이 우리가 지금 문경 새재를 지났다고 알려주신 기억이 난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문경 새재를 지나긴 했지만 제대로 느껴보진 못했다. 그 아쉬움이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이 겨울에 다시금 이곳을 찾게 만든 게 아닐까.
칼바람도 피할 겸 점심식사를 하고 나와 가장 먼저 찾은 장소는 문경 새재 초입에 있는 옛길 박물관이다.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이름이 높았던 문경새재의 역사 문화적 특성을 살려 만든 박물관인데 전시가 아주 잘 되어 있고 심지어 무료다! 박물관 입구에는 옛길보존기념비석도 크게 세워져 있길래 단체 사진을 먼저 한 장 찍고 시작하였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셀카봉을 세워 놓고 낑낑대고 있자니 지나가던 웬 아저씨가 찍어주셨다. 찍어주시는 아저씨의 빨간 코를 보며 우리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고, 왠지 즐거워서 웃음이 막 났다. 예뻐보이려 애쓰지 않고 호방하게 웃은 이 사진이 자연스럽게 잘 나왔음은 물론이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전시. 하지만 눈길 가는 곳마다 인부들이 전시를 들어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전시는 국내 여러 박물관을 돌아다니는 중!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의 눈길만 받으며 부산으로 떠나간 전시... 우리가 하도 아련하게 쳐다보니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설사님이 눈에 레이저를 팟! 켜고 우리에게 접근해 오셨다. '설명 좀~~ 해드릴까예?' 설명하시는 와중에도 전시는 하나씩 들어져 옮겨갔지만, 역사와 본인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분의 적극 설명에 아는 내용조차 더 새롭게 와닿았음은 물론이다!
특별전시 말고 상설전시관도 아주 깔끔하게 잘 돼 있다. 문경에서 출토된 400여 년 전의 옷도 있는데, 보존이 잘 된 것도 놀랍고 너무 큰 사이즈도 좀 놀라웠다. 또한 우리민족 제2의 애국가 아리랑에도 문경새재가 많이 언급되는 걸 이번에 새로 알았다. 옛 영남 지방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갈 때 항상 넘던 고개라서, 희망찬 길의 심벌로 쓰였다고 한다. '관갑잔도'라는 시도 읽었는데 '꾸불꾸불 새재 길 양장 같은 길/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 듯 오르네'라는 구절을 읽자 말과 나귀와 하인들이 불쌍했다.. 역시 양반에게만 희망의 길이었던 것이야.
하여간 '옛길'로 표현된 문경의 역사 관련 유물과 전시를 열심히 보다 보니 시간이 잘 갔다. 이 박물관 평점이 높던데 괜히 높은 게 아니었다.
박물관을 나선 후 문경새재 제 1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경새재는 '새도 쉬어가는 힘든 고개', '억새풀이 많은 고개' 등의 설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 험준한 천혜의 요새를 버려두고 탄금대에 진을 쳐 전사한 신립 장군 설화, 추풍령을 지나가면 낙엽 떨어지듯 과거에서 떨어지지만 조령(새재)를 지나가면 새가 날아가듯 과거에 척 붙는다는 미신 등 익숙한 여러 이야기를 품은 고개.
칼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패딩 안으로 한기가 등뼈까지 서리는 느낌인데 그 와중에도 옛 선비들은 여길 지날 때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는 나의 위대한 역사적 상상력!
역사를 전공하고 업으로 삼은 사람 중에 나만큼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사실 흔치는 않겠지만, 나만큼 역사적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정이입을 잘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라는 게 답사를 하며 강화되고 있는 일종의 자부심(혹은 정신 승리)이다.
그 자부심은 태조 왕건 촬영장을 찾아 왔던 8살 꼬마 시절부터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찾아온 그 촬영장은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전설의 태조 왕건뿐 아니라 내가 사랑한 옷소매 불은 끝동까지, 수많은 사극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가 되어 있었다. 초입부터 경복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광화문이 반겨주는 이 촬영장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다. 실제 유적이 아니라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장이지만 잘 만들어 놔서 정말 과거에 떨어져 온 것만 같았다. 이 골목에 가면 조선시대였다가, 저 골목에 가면 고려시대였다가 그러기는 했지만...!
너무너무, 너무너무 추워 오래 보지는 못하였다. 이가 덜덜덜 떨리고 발끝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MZ쌤의 안동 현지 친구분이 추천해준 불닭+갈매기살을 함께 파는 맛집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중에도 너무 추워서 덜덜 떨었다. 왜 이렇게 추운가 했더니 알고 보니 내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 날은 아직 몰랐다.
하지만 추운 와중에도 저녁 식사가 너무나 맛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 역시 현지인 찬스는 최고다.
아주 어둑해져서야 산길 강길을 뚫고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는데, 내리자마자 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아득하게 수놓아진 밤하늘 때문이었다. 고개를 최대한 꺾어 올리고 눈이 빠져라 별을 감상하였다. 너무 시려서 잠깐 감았다가 다시 뜨면 별들이 눈 안에 쏟아질듯 한가득 들어왔다.
아, 별이 빛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