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식의 몰락(?)
대한상공회의소에선 5년마다 100대 기업의 인재상 관련 조사 보고서를 내놓는다. '인재상'은 해당 기업이 원하는 사람의 특성을 말하는데 채용, 승진, 상벌 등의 인사 조치의 기준이 된다. 이는 기업의 핵심 가치와 직결되기 때문에 회사의 지향점과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우선, 2018년에 내놓은 보고서 중 인재상 변화 도표다. 2008년부터 5년마다 조사한 결과의 추이를 순위 순으로 보여 준다.
올해가 마지막 조사 해인 2018년에서 5년째 되는 해라 최근 새로운 조사 결과가 나왔다.
혹시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하셨는가?
'주인의식'이 '책임의식'으로 바꿨다. 단순히 2023년에 '책임의식' 항목이 추가되서 달라진 게 아니라 2008년, 2013년, 2018년 조사 결과에 있던 '주인의식'까지 전부 '책임의식'으로 바꿨다. 왜 이랬을까?
나의 추정은 이렇다.
주인의식이란 인재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했나 싶다. 사실 인재(직원)은 주인이 될 수 없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다. 그럼에도 '주인'처럼 일하라는 것은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라'는 의미였다. 이런 얘길 젊은 직원들에게 해보라. 바로 초극상 꼰대로 등극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적절하게 마사지를 해준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정을 해본다.
최근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 <대행사>에 보면 직원을 '머슴'에 비유하는 얘기나 여러 번 등장한다. 창업주 입장에서 결정을 내가 하고 실행만 하는 사람으로 직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야말로 '주종 관계'다. 1998년 IMF 구제 금융 위기 단초가 된 한보 사태의 한보 그룹 고 정태수 회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자금이란 것을 주인이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
한 의원이 추가 자금 지원에도 한보 철강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그룹 임원의 검찰 진술 내용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주인의식을 책임의식으로 바꾼 것은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본다. (물론 보고서의 신뢰성은 엄청나게 떨어뜨린다) 적어도 시대적, 세대적 흐름을 인식했기에 가능했을테니 말이다. 다만, 책임의식 역시 주종까지는 아니어도 '상하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어 만족스럽지는 않다.
세상이 빨리 변하고, 변화의 폭도 깊다. 경영계에서 우수 사례로 칭송받던 기업들이 수년이 지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연하지 못한 상하관계가 효용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상하 구조를 지탱하는 힘은 상부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는 보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위에서 내려 오는 결정이 잘못되면 실행의 적절성은 그것을 만회해주지 못한다.
예전에 재벌 그룹은 중앙에 '비서실', '경영전략본부', '구조조정본부' 등의 브레인 조직을 뒀다. 이들은 회장을 직접 보좌하며, 그룹 차원의 주요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최근 들어 이런 조직들이 아예 없어지거나 계열사 단위로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제 거시적인, 종합적 접근으로 시장과 고객을 만족시키기엔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다. 혁신은 분권화에서 시작될 조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