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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영 Emilio Oct 21. 2020

또라이 상사는 내 운명(?)

팀장으로 산다는 건2_#2 

20XX년 어느 날, 경쟁사 분석 보고가 있어 무척 분주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며칠을 팀 전체가 야근해서 보고자료를 만들었죠. 당일 상무님께 보고를 시작했습니다. 첫 페이지, 경쟁사와의 역량 비교 '레이더 차트'를 말씀드리는데, 갑자기 버럭 하셨습니다.


"나도 이거 그릴 줄 알아!"


일순간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침묵이 흘렀습니다. 


"뭐 해? 계속해... 계속하라고."


상무님은 발표 내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분석 자체가 잘못됐고, 보고서 형식도 엉망이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재작성을 지시가 이어졌습니다. 2주 후 핵심 내용은 그대로 살리되 구조를 바꿔 다시 보고드렸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라고... 하면 되잖아... 나가봐." 


상무님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건성건성 말했습니다. 


원래 저는 헤드헌터를 통해 사장님이 직접 채용을 하셨습니다. 후일 상무님은 반대하셨다고 들었고요. 애초부터 안 좋은 감정이 있으셨던 겁니다. 겪다 보니 아랫사람을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성향도 있었습니다. 열등감의 표출이었지요. 또 변덕은 왜 그리 심한지요. '럭비공'이 그 상무님 별명이었습니다.


또라이 상무

'나를 힘들게 하는 또라이들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클라우디아 호호부룬, 2020)이란 책에는 또라이를 아홉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1. 피해망상 또라이 -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사람

2. 자뻑이 또라이 - 자신을 너무 확신하는 사람

3. 대마왕 또라이 -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사회성 제로인 사람

4. 변덕쟁이 또라이 -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한 사람

5. 원칙주의자 또라이 - 말이 안 통하고 규칙을 맹신하는 사람

6. 겁쟁이 또라이 - 상처가 두려워 숨어 사는 예민한 사람

7. 우유부단 또라이 -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사람

8. 디바 또라이 - 과장되게 행동하고 이기적인 사람

9. 괴팍이 또라이 - 자기 주관과 고집대로만 하는 사람


불행히도 위의 한 가지 유형에만 속하는 또라이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복합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됩니다. 저는 이걸 세 가지 속성으로 요약해봤습니다. '일관성 결여(3, 4, 8, 9)', '나르시시즘(2, 5)', '책임감 미흡(1, 6, 7)'. 즉, 원칙 없는 사람, 자기애가 과도한 사람,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는 또라이입니다. 안타깝지만 상무님은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라이는 영원히

언제부턴가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또라이 상사를 피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도 거기도 비슷한 또라이들이 있다는 것이죠. '매운맛' 또라이가 없다면, '순한맛' 또라이 여러 명이 있는 식입니다. 그래서 아래 그림을 그려 봤습니다.


나의 또라이 상사 연대기 @김진영 


저의 초기 15년간의 직속 상사, 그 상사의 상사, 대표들이 어떤 인간들이었는지 회상해봤습니다. 여러 번의 이직과 부서이동 등을 경험한 저는 또라이 상사와 늘 함께 해왔더군요. 덕분에 회사 생활이 쉽지 않았고요. '정말 저 사람만 없어져 준다면 뭐든 하겠다'란 위험한 생각도 했었답니다. 


또라이들이 왜 이렇게 널리 퍼져 있을까요? 또라이들은 업무 처리에 과단성을 보여 줍니다. 냉정하게, 쉬크하게 보입니다. 그만큼 '동정 없이' 쳐내길 잘하죠. 위에서 보면 실행력 있는 사람으로 비췹니다. 많은 경우 품위를 생각하는 사장을 대신해서 손을 더럽히는 일까지 기꺼이 해냅니다. 사장 입장에선 아주 고마운 존재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이면 직속 상사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까지 또라이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미 이들은 변수(變數)가 아니라 상수(常數)입니다. 


[참고] '경영자 다섯 명 중 하나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고 있어'

https://cnb.cx/35kGUw6, CNBC, 2019. 4. 19.


또라이 상사 대응법

(1) 또라이 감별

진짜 또라이인지 판단합니다. 그냥 '나쁜' 상사와 '또라이' 상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둘 간에 큰 차이점은 상식 수준의 대응으로 개선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상사와 잘 지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진솔하고, 예의를 다해 응대한다

- 사전 준비를 잘해 조리있게, 근거로 설명한다

- 기분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접근한다

- 찾기 전에 먼저 보고한다

- 상사의 어려움을 헤아려라


대충 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 상식이 있어야 통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또라이 상사는 그럴 대상이 아니죠. 우선, 상사의 또라이 짓을 두고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마치 칼 든 도둑 앞에서 '왜 저러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할지, '대응'만 생각하셔야 합니다.


(2) 또라이 상황 파악

팀장의 상사, 즉 임원급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임원의 니즈는 뭘까요? 사장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최우선 니즈일 것 같습니다. 임원의 일반적인 수명은 3~4년이 일반적입니다. 그 안에 뚜렷한 성과가 없으면 사장이 되긴 어렵습니다(물론 정치적 작용에 의한 승진은 여기선 논외의 이슈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또라이 상사(임원)의 사장 가능성에 대해 가늠해보는 건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그(녀)가 오너 패밀리거나, 사장이 유력하다면, 그 회사를 떠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3) 대응 방법

첫째, 그냥 무시한 채 사는 겁니다. 철저하게 일의 관계로만 생각합니다. 욕을 하던, 변덕을 부리던 무념무상의 상태로 지내는 것이죠. 이건 체념과 포기가 동반되는 마음의 수양을 해야 합니다. 미친 개가 짖고 달려와 물어대는 건 내 잘못은 아닌 것이죠. 어쨋거나 시간은 흐르고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둘째, 직속상사(임원)의 상사(대표)에게 탄원하는 방법입니다. 이는 또라이 상사와 대표와의 관계가 소원할수록 효과적입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또라이이기 때문에 효용가치를 가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규사업을 추진할 때 조직의 변화를 가져와야 그것이 가능함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직의 변화는 현재 임원들의 자리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또라이 임원은 그것을 극구 반대했었죠. 결정은 사장이 하는데, 사장한테 보고하기 전에 그 임원 선에서 자꾸 커트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사장에게 따로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났습니다. "이거 첩보 영화 같아." 사장이 그랬었죠. 저를 따로 만나줄 만큼 저를 신뢰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몰랐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사장에겐 그 또라이 임원도 쓸모가 있는 존재였더군요. 결국에 제가 먼저 퇴사했습니다. 


셋째, 대차게 한 번 붙어보는 겁니다.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합니다. 또라이 상사는 길길이 날 뛰겠죠. 그래도 철저하게 포커페이스로 차분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 또라이 상무와 물류팀장의 싸움은 오랫동안 회자된 사건이었습니다. 물류 비전문가였던 상무는 지속해서 물류팀장에게 보고와 재보고를 지시했습니다. 제가 옆에서 봐도 쓸데없는 보고였는데, 물류팀장도 어지간히나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고 물류 이슈가 논의되려 할 때였습니다.


상무 : "O팀장(물류팀장), 내가 수정 보고하라는 거 다 됐나. 다 됐으면 여기서 보고해."

물류팀장 : "보고 준비 안 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상무 : "다들 나가!"


'아이고, 곡소리 나겠구나'하고 저를 포함한 다른 팀장들은 회의실을 빠져나왔습니다. 밖에서 계속 동정을 살피는데 회의실에선 별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물류팀장은 밖으로 나왔고, 우리는 다시 들어가 회의를 이어갔습니다. 상무도 아무 언급이 없어서 도대체 둘 간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길은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류팀장은 사표를 내고 퇴사했습니다. 후에 회의실 옆에 붙어 있던 구매팀 직원이 그날의 회의실에서 들려온 소리를 알려줬습니다. 우리가 회의실에서 나오고 나서 물류팀장이 조목조목 상무 지시의 불합리성을 얘기하며 사직 의사를 밝혔고, 상무가 간곡하게 만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상무 스타일을 생각해볼 때 예상 밖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럴 경우는 본인도 상처를 입을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본인이 퇴사하지 않는 상황이라도 문제를 일으켰다는 오명을 쓸 수도 있고, 다른 상사들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습니다. 


또라이 상사에 대한 다른 생각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유명 기업 CEO 중 5% 정도가 소시오패스라고 합니다. 위대한 CEO로 칭송받는 스티브 잡스 역시 괴팍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성격 탓에 '성공한 CEO'와 '적합한 리더십'간의 관계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또라이 상사를 만나지 않으면 천운이겠으나, 사장이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고 합니다. 국내 기업 CEO들의 MBTI(마이어-브릭스 유형 지표) 연구를 진행했던 분의 말씀으로는 CEO와 해당 기업 임원들의 MBTI 유형이 비슷한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또라이 상사를 이중, 삼중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이런 점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상사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생각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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