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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E Nov 15. 2023

소소하게 행복했다, 진짜

사계절만 살아보면

아직 마음이 가을을 보내지 못했는데 제주는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와 함께 찾은 집 앞 바(bar)에서도 도민이 사랑하는 커피숍에서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는 걸 보니 금세 겨울이 올 듯하다.


제주 생활에서 성취감을 나에게 선물해 주기로 다짐한 이후 다이어리에 적혀있는 (제주의) 버킷리스트는 작고 소소해 귀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성패의 여부가 결정되는 '사계절의 한라산 등산' 따위의 것들이었다.


몇 주 전부터 가을 등산을 한라산에서 함께 하자는 사탕발린 말에 기어코 연차를 쓰고 서울에서 친구가

내려왔다.


하필이면 주말 일기예보가 바람 아니면 구름, 구름 아니면 비일 줄이야. 그리고 며 칠 전 비가 내리더니 제주의 하늘은 잿빛의 향연이었다. 맑은 날 없이 기온까지 급격하게 떨어져 가을이지만 겨울이라고 해도 무관한 날씨를 보였다.


가는 날이 장날.

날씨로 인해 친구 방문 때문에 미리 써 뒀던 나의 평일 연차를 한라산 가는 날로 변경하고 주말에는 곳곳의 맛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일요일 제주에는 작년 보다 18일이나 이른 한라산 첫눈 소식으로 도전하기도 전에 리스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다.

우천으로 인한 등산 불가능은 생각해 봤지만 눈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나 겨우 9개월 제주에서 살아 본 사람이나 어처구니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이번 산행을 위해 트레킹화까지 구입했는데.. 내가 미안해 할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은 비행기까지 타고 내려온 손님에 대한 인지상정의 마음정도였다.


틀어져 버린 계획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맛집 여행이 되어있었다.


연차가 끜나고 서울에 친구는 무사히 올라갔고, 나는 2킬로그램이 쪘을 뿐이다.


그저 계획이 계획으로만 끝났지만 처음부터 별수롭지 않았던 계획이라 미련 따위로 남겨두지 않기로 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셨고, 다양한 바에 갔으며 여전히 좋은 사려니숲을 걸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게 제주의 삶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너무 치열하지 않게 사는 삶,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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