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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Oct 16. 2023

27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 본 부산아재

뤽 베송 감독의 레옹(Leon).


대학 합격 후 입학도 하기 전에 만난 동기들이랑 보러 간 영화였다.

킬러인 장 르노가 12세 이웃 소녀 나탈리 포트만과 사적 복수에 나서며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의 뼈대다.

장 르노가 은거지를 옮길 때 애지중지하는 화분을 옆구리에 끼고 걷거나 영화 막판 좁은 집에서 벌이는 총격 액션씬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영화도 영화지만 고3을 지나 성인이 됐다는 자각과 함께 입시라는 하나의 통과의례를 지났다는 설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때 본 레옹이라는 영화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28년 뒤 뤽 베송을 다시 만났다.

레옹을 만들었던 혈기왕성한 36세 감독은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장 감독이 돼 있었다.

뒤늦게 필모그래피를 보니 이 감독도 참 열심히 산 거 같았다.

28년간 무려 80여 편의 영화를 감독, 제작, 기획하거나 시나리오를 썼다.

그중엔 이미 본 영화도 더러 있었지만 거의 전부 뤽 베송이 만든 영화인 줄 모르고 본 것이었다.

이번엔 뤽 베송이 만들었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려고 했다.

뤽 베송 감독의 도그맨(Dogman).

2006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부산 수영만요트경기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사진=연합뉴스)

대학교 2학년인가 부산에서 첫 국제영화제를 한다고 떠들썩했다.

첫 해부터 15년간 개막식을 치를 만한 전용 영화관이 없어 수영만요트경기장에서 대형 스크린을 세웠다.

영화 마니아들은 부산에 죽치고 앉아 영화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국제영화제를 유치해 매년 행사를 연다고 영화의 도시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부산은 PIFF(지금은 BIFF) 이후 ‘영화의 도시’가 됐다.

개막작, 폐막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상영작들도 불과 몇 분 만에 매진이 됐다는 뉴스를 봐서인지 한 번도 영화제 상영작을 보러 갈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

남들은 휴가 내고 오기도 하던데 부산에 살면서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의전당 가로 24m, 세로 13m 대형 스크린 바로 아래 좌석.

27년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한 편 안 보다가 웬일인지 올해엔 뭔가 하나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들었다.

예매 시작일이 며칠 지난 시간이었지만 찾아보니 아직 자리가 남은 영화가 몇 있었다.

그래 어쩌면 몇 분 컷이라는 부산국제영화제 매진 뉴스를 지나치게 신봉한 영향이었을 수도 있겠다.

(BIFF 조직위 측이 이번 영화제 결산 기자회견에서 밝힌 좌석 점유율은 82%였다. 인기작이 아니라면 충분히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예매창에서, 28년 전 남포동 극장에서 아직 입학도 안 한 대학 동기들이랑 희희낙락거리며 봤던 레옹의 감독 '뤽 베송'이라는 낯익은 이름을 봤다.

아련한 옛 기억이 소환되며 난 영화 소개글, 출연진조자 안 보고 예매 버튼을 눌렀다.


10월 6일 오후 8시 부산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은 선선한 바람 속에 들뜬 분위기였다.

평소 자주 오는 영화의전당이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제의 마지막 '제'자가 축제라는 의미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객석은 많은 관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는 내 시야에 한 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넘치게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난 가로 24m, 세로 13m 대형 스크린 바로 아래 자리를 잡았다.

상영시간이 되자 놀랍게도 뤽 베송 감독이 출연진 1명과 단상에 올랐다.

유머러스하게 간단한 인터뷰를 한 뤽 베송은 "여러분과 제 영화를 보는 것이 쑥스러워 잠시 나갔다가 영화가 끝날 때 다시 오겠다"는 덩치,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끄럼쟁이 말을 남기고 내려갔다.

제법 여유 있는 풍채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뤽 베송은 관객과의 만남을 즐기는 듯했다.

감독으로서 관객을 만나는 자리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영화 도그맨 감독 뤽 베송(가운데 오른쪽)

도그맨은 영화 제목처럼 개(dog)가 나오고 남자(man)가 나왔다.

여러모로 영화 '조커'가 연상됐지만 마냥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름 액션씬도 영화에 어울리게 잘 배치됐다고 본다.(난 레옹에서 봤던 총격액션의 변주를 계속 기대했던 것 같다.)

주인공인 칼렙 랜드리 존스와 수많은 개들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뤽 베송은 다시 나타나 관객들에게 90도 인사한 뒤 손하트를 뿅뿅 날렸다.

가을밤 대략 3천명 관객과 함께 강바람을 맞으며 야외극장에서 대형스크린으로 영화를 본 경험은 절로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나 개막작인 '한국이 싫어서'도 보고 싶었지만 끝내 표를 구하지 못했다.

도그맨, 내 생애 첫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이었다. 왜 이제야 왔는지 잠시 후회도 됐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여러 감정을 느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지난 13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70개국 총 209편, 폐막작 '영화의 황제'(감독 닝하오)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많은 기사가 쏟아졌지만 가장 재미있고 관심 있게 읽은 기사가 있었다.

홍콩 배우 주윤발 인터뷰 기사였다.

국민학교 때 영웅본색 시리즈나 첩혈쌍웅 등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본 것도 모자라 복사본을 떠 정말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보고 또 봤다. 아마 그렇게 돌려본 사람이라면 나처럼 아재다.

이후 주윤발과 영웅본색은 내 유년시절 추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주윤발은 여전히 영화를 찍고 마라톤을 하고 기부를 하고 유머가 넘치고 할 말은 했다.

주윤발 따거(부산말로 행님)는 "중국의 검열이 굉장히 심해 홍콩 감독들이 힘들다"며 "홍콩 정신이 살아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는 또 "늙는 건 무섭지 않다. 그것이 인생이다.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며 "나는 언제나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고 답했다.

그가 '중국화'된 홍콩에서 눈치 보지 않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식이 열리는 영화의전당에 대해 한 마디.

사실 영화의전당은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평상시 더 돋보이는 곳이다.

가로 162m, 세로 60m 크기의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거대한 지붕을 기둥 하나로 지탱하고, 23142개 LED가 빽빽이 설치돼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빅루프 건물로 유명하다.

이 건물은 국제영화제 전용관으로 2004~2005년 설계 공모를 거쳐 2011년 준공했다.

부산시와 주최 측은 세계 건축계에서 유명한 6개국 7곳의 건축사사무소에 설계비 7천만원을 주며 설계안을 맡겼다.

이렇게 받은 7개 설계안을 국내외 건축 대가 4명에게 3박 4일간 최종심사를 맡겨 3개 안으로 범위를 좁혔으나 심사위원들은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아 의견일치가 되지 않았다.

급기야 심사 기한이 끝난 외국 건축 대가는 본국으로 돌아가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부산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영국, 일본, 프랑스 심사위원 3명을 초빙해 갑론을박 끝에 오스트리아 쿱(coop) 사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문제는 설계 특성상 470여억원의 건축비가 턱없이 모자랐고 부산시는 정부와 갈등 끝에 추가로 예산을 받고도 거의 시예산으로만 1천억을 포함해 총 1천600억원을 들여서 2011년 영화제 개막 전 준공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지붕 구조를 가진 건물로 기네스북엔 올랐지만 공사 도중 1명이 숨지고 개관하는 날 지붕이 물이 새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영화의 전당은 광안대교와 함께 명실상부한 부산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곳은 대중 영화를 비롯한 돈 안 되는 예술, 독립 영화를 상영하는 거의 유일한 부산의 문화영상공간이다.

한국 영화의 저변을 넓히고 실력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감독들이 관객을 만나 소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도 넓어 아이들이 뛰어놀거나 자전거, 인라인 타기에도 좋다.

일반 극장보다 관람료도 저렴하다.

영화 관련 도서와 각종 영화, 영상 자료를 볼 수 있는 영화도서관도 있다.

찾아보면 무료 상영, 문화공연도 많다. 각종 축제와 문화행사도 열린다.

부산시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기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설이다. 세금 낸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난 영화의전당에 레스토랑이 하나 들어온다면 좋을 거 같다.

영화와 음식의 만남,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영화 엔딩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불 켜지지 않는 극장이 부산에 하나쯤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럽고 썩 괜찮은 일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보러 가는 길에 본 영화의전당 빅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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