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억원.
살면서 만져보거나 통장에 찍힌 적 없는 비현실적인 금액이다.
올해 9월 부산 해운대의 한 43평 아파트 매매가격이다.
부산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엘시티(LCT)다.
이번 생에 살아볼 날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최근 다녀왔다.
10월 25일 오전 8시 30분 엘시티 앞.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엘시티는 초고가 아파트지만 초고층으로도 유명하다.
랜드마크 타워동 기준 높이 411.6m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건축 당시부터 101층이라는 아찔한 높이로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엘시티는 항상 '높이'로 이야기되는 곳이었다.
2018년 3월 2일 엘시티 A동 공사 당시 55층 외벽에 부착된 안전작업발판 구조물이 200m 아래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박스 형태 구조물 안에서 외벽 유리 부착 작업을 하던 근로자 3명을 포함해 총 4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안전사고와 산업재해 속에 당시 사고가 큰 반향을 일으킨 건 분명 '높이'에 있었다.
하지만 그 아찔함만큼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인간의 욕심으로 최고를 향해 치닫는 초고층 건물은 거의 매번 인간을 제물로 삼았다.
엘시티의 그 높이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전국에서 소방관 895명이 부산에 집결했다.
엘시티 101층을 누가 가장 빨리 오르는지를 가리기 위해서다.
엘시티 2372개 계단을 오르며 체력을 기르고 초고층 건물 화재 대비 훈련도 겸하는 취지였다.
소방관은 아니었지만 소방관들 틈에 끼어 이번 대회를 잠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운 좋게 얻었다.
귀한 체험인 만큼 진지하게 임하고 싶었다.
스타트 지점부터 골인 지점까지 심장이 터질 듯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벽에 붙은 층수는 마치 느리게 가는 시계 같았다.
숫자는 느리게 올라갔고 층이 높아질수록 숫자는 더욱 더디게 바뀌었다.
거친 들숨과 날숨만을 반복하고 심장은 마구 요동치던 어느 순간 미국 9.11 테러가 떠올랐다.
아마도 소방관들이 계단을 오르는 행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화재 재난 현장으로 올라갔지만 돌아오지 못한 소방관들이 잠시 생각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소방관들의 희생과 노고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직업이라는 이유로 소방관에게 지나친 사명감을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드디어 마침내 101층 결승선을 통과했다.
한동안 정신을 못차리다가 뒤늦게 전망대 통유리로 내려다본 해운대는 비현실적이었다.
해수욕장을 거니는 사람들은 개미 같았고 오가는 차량은 미니어처 같았다.
411m의 높이를 새삼 실감했다.
천혜의 해수욕장이 있는 해운대 해변에서 유독 기형적으로 솟아있는 엘시티.
난쟁이 건물들 사이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으로 스카이라인을 파괴하는 마천루.
애초 고작 10여층 정도로만 건물을 올릴 수 있도록 고도제한이 있던 지역에서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 배경엔 당연히 특혜의혹이 일었다.
하지만 사업주의 비자금 조성과 정치인 등에 대한 로비가 드러났지만 엘시티는 사업 취소나 설계 변경 없이 쭉쭉 올라갔다.
그런 엘시티가 해운대해수욕장의 상징이 된 건 아이러니다.
상징이라기보다는 그 특출 난 높이 때문에 안 보려고 해도 어디서든 잘 보이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101층, 411.6m, 2372개 계단의 엘시티를 24분 19초에 힘겹게 올랐다.
지난해 방화복 부문 1위 기록이 23분 48초였으니 민간인 신분으로는 나쁘지 않은 기록이라고 생각했다.(2초 정도 다음 생엔 소방관을 해야하나 고민했다;;)
힘들게 올라간 데 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데 걸린 시간은 허무하게도 50초에 불과했다.
갈수록 초고층 건물은 많아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근접할 것이다.
소방관들의 무사 건투 건승을 기원한다.
아래는 이번 대회에 번외로 참가한 뒤 쓴 글이다.
'헉∼ 헉∼'
호흡은 망가진 지 이미 오래.
한발 한발이 천근이다.
빌려 입은 소방관 방화복 안은 땀범벅이다.
등에 멘 산소통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몸을 옥죄어 왔다.
한 층만 더, 한 층만 더….
걸어도 걸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100층이라는 숫자가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마지막 있는 힘을 쥐어짜 101층 결승선에 몸을 던졌다.
가쁜 숨이 터지며 몸이 반으로 푹 꺾였다.
25일 오전 부산 해운대 엘시티(LCT)에서 전국소방공무원 계단 오르기 대회가 열렸다.
소방관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려는 취지에 무거운 방재복을 빌려 입고 도전에 나섰다.
높이 411m의 엘시티는 551m 롯데월드타워 다음으로 높은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초고층 건물이 가장 많은 부산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엘시티 1층에서 101층 정상까지 계단은 모두 2천372개.
지난해 방화복과 산소통을 맨 채 엘시티 101층을 23분 48초에 가장 먼저 올라간 충북 청주 동부소방서 윤바울 소방교는 이번 대회에서 21분 03초로 기록을 더 당기며 1등을 차지했다.
이는 1개 층, 약 23개의 계단을 12.5초에 오르는 속도로 101층을 꾸준히 올라야 나올 수 있는 기록이다.
윤 소방교는 "술을 끊었고 한 달간 달리기, 근력강화운동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올해도 20층부터 힘들었다"며 "꾸역꾸역 참고 올라갔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올해엔 지난해 670명보다 많은 전국 소방공무원 895명이 참가해 대회 규모가 더 커졌고 그만큼 경쟁도 더 치열했다.
정년을 한해 앞둔 최고령 참가자인 대구 중부소방서 서정관 소방경의 분투도 빛났다.
서 소방경은 "방화복을 입고 완주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며 "고층 건물 화재에 대비해 평소 많은 노력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회가 끝난 뒤 소방관들은 엘시티 계단을 오르며 실제 화재 등의 긴급 상황이라면 무엇을 가장 먼저 고려했을지 궁금해 물어봤다.
인명을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선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 소방관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의외였고 재난 구조활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방화복을 입고 완주한 대전 동부소방서 소속 방덕귀(49) 소방장은 "재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순발력이 중요하다"며 "하지만 소방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작전 실패"라고 말했다.
현재 소방 당국이 보유한 고가 사다리차가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최대 높이는 지상 23층, 70m 정도다.
고가 사다리차에서 물을 쏠 수 있는 한계는 50층 정도로 높이 411m, 101층에 달하는 엘시티 같은 초고층 건물에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첨단 초고층 건물에는 화재 등에 대비한 비상용 엘리베이터나 피난안전구역이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찮은 경우엔 소방관의 직접 구조가 불가피하다.
2001년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알카에다의 공격을 받은 9·11 테러 때 수백명의 소방관들이 상층부에 고립된 인명을 구하러 1층에서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숨졌다.
세계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340명의 소방관이 숨졌다.
당시 세계무역센터 최상층 높이가 411m로 공교롭게도 이날 소방관들이 오른 엘시티 높이와 같았다.
화재·재난 현장에서 소방관의 사명감에만 기대어 구조활동을 펴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큰 희생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로봇과 드론 등을 활용한 첨단 화재진압·인명구조 장비가 시급히 개발돼야 할 이유다.
2013∼2022년 10년간 순직한 소방관은 모두 41명이며 이 중 13명이 화재 진압 현장에서 숨졌다.
같은 기간 직무 중 다쳐 공상이 승인된 소방관은 6천909명이었고 이 중 화재 진압 과정에서 다친 이는 1천472명이었다.
소설가 김훈은 2021년 11월 9일 소방의 날을 기념한 헌정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려서 돌아오라, 살아서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