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시행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비로소 시작되는 거대한 전환
1994년, 미국 국제개발처에서 근무했던 멜로디 타운셀(Melody Townsel)은 함께 일하던 B변호사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타운셀이 B변호사의 클라이언트 회사에 "더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항의했는데, 그때부터 신체적·정신적 학대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한 호텔 로비에서 저를 쫓아오면서 물건을 던지고, 제 방에 협박 편지를 밀어 넣었어요. 거의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본국 지시를 기다리는 2주 동안, 결국 그를 피해 거의 호텔 방 안에만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항의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중상모략이 뒤따랐어요. 그는 제가 돈을 훔쳤다고 했고, 또 제 몸무게를 비하하는 말도 했어요. 심지어 제 성적 취향을 시사하는 발언도 하더군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나를 공격한 겁니다."
타운셀이 이런 사실을 공개한 것은 2005년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보낸 서한을 통해서였다. 당시 상원 외교위는 유엔주재 미국 대사 후보자로 지명된 B변호사가 대사 자격이 충분한지 검증하고 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유엔주재 대사라고? 그렇다. B변호사는 현재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판문점에 다녀간 존 볼턴(John R. Bolton)이다.
조직 심리 전문가 로버트 서튼(Robert I. Sutton) 스탠퍼드대 교수는 자신의 책 '또라이 제로 조직(The No Asshole Rule)'에서 "진술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볼턴은 분명히 '공인 또라이'"라고 적었다. 볼턴의 학대는 "지속적인 행동 양식의 하나이지, 일진이 안 좋은 날 컨디션이 나빠 어쩌다 표출된 성격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당시 미 상원 외교위원회엔 과거 볼턴의 또 다른 부하 직원의 진술도 제출되었다. 진술서엔 "볼턴은 윗사람에게는 알랑대고 아랫사람은 쥐어박는 인물"이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런 논란에도 볼턴은 유엔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휴회 중 고위 공직자 임명" 방식을 통해 강행한 것이다. 임명 직전 공화당의 적극적 지지자들은 타운셀의 진술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메신저를 공격하라' 전략?) 타운셀이 2004년 대선 기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부시 대통령을 반대하는 캠페인에서 활동한 '민주당원'이라며 집중 공격한 것이다. 이에 타운셀은 "내가 이 단체에서 홍보 활동을 한 것은 맞다"면서도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볼턴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발생하면 어떻게?
존 볼턴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이달 2019년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라 이름 붙인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전격 시행되기 때문이다. 법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 내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법 제76조의 2)라고 정의하고 있다. 볼턴의 사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전형적인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인다. 이런 일을 직접 당하거나 목격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볼턴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A. 신고
신고의 주체는 "누구든지"(법 제76조의3 ①) 할 수 있다. 볼턴 사례에선 타운셀이 직접 해도 되고, 피해를 목격한 제삼자가 해도 된다. 신고는 회사 인사부서에 하는 게 통상적이다. 고용노동부 매뉴얼에 담긴 '대응규정 예시안'에서는 "회사 내 인사부서에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업무를 총괄하여 담당하는 직원을 둔다"고 되어 있다. 인사팀에 고충처리 담당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 신고 접수처라고 보면 된다.
B. 조사 착수 / 임시 조치
'괴롭힘'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면 회사는 지체 없이 사실 조사에 나서야 한다.(법 76조의3 ②) 조사 기간 동안에는 피해자에 보호 조치도 이뤄져야 한다. 회사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일하는 장소를 바꾸거나, 유급휴가를 주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 (법 76조의3 ③) 게다가 이 모든 조치와 관련해 회사는 피해 근로자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예컨대, 볼턴 사례에서 회사가 '보호 조치' 운운하면서 타운셀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하려면, 타운셀의 반대가 없을 때만 가능하다.
C. 조사 결과에 따른 처분
조사 결과 괴롭힘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회사는 두 가지 조치를 해야 한다. 우선 피해자에 대해 근무장소의 변경이나 배치전환,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 (법 76조의3 ④) 또 가해 행위자에 대해서도 징계, 근무장소의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이 경우 회사는 징계 등과 관련하여 사전에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법 76조의3 ⑤)
가해자 처벌 조항은 없지만.. 그래도 거대한 전환의 시작
여기까지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가해자는 직접 처벌되지 않는 걸까? 결론적으로 얘기해 16일부터 시행되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는 별도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가해자를 처벌하려면 폭행죄, 모욕죄, 명예훼손죄 같은 일반 형법 조항으로 처벌하거나, 아니면 기존 근로기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조항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예컨데 볼턴의 경우, 물건을 집어던졌으니 형법상 폭행죄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타운셀을 향해 폭언을 하고 허위 중상을 하고 다녔으니, 모욕죄나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등의 적용도 검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도입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또라이 상사'를 형사 처벌하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바로 신고자와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처분 금지' 조항 때문이다.
제76조의3(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
⑥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신고한 근로자 및 피해 근로자 등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 조항을 위반할 경우, 사용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신고자나 피해자를 징계하거나 부당한 인사 조치를 하는 것만으로 형사처벌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상사의 갑질에 맞서려면 부하 직원들 입장에서는 각종 불이익을 각오해야 했다. 상사의 만행을 외부에 폭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거나 인사조치를 당하더라도, 이를 처벌할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나 신고자에게는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아니 된다"는 법적인 안전장치가 주어지게 된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칼'보다는 '방패'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20대 국회에서도 사장될 뻔한 '괴롭힘 방지법'
사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된 법안이다. 20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2016년 6월 이인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을 시작으로 여러 건이 발의됐지만, 2018년 초까지는 제대로 된 심사도 이뤄지지 못했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그 파장을 가늠할 수 없는 법안인만큼, 국회의원들도 굳이 속도를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바뀐 것은 2018년 2월, 서울의 한 대형병원 신입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였다. 고인의 죽음 이면에 '태움'이라 불리는 교육을 빙자한 집단 괴롭힘 문화가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사회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 문화를 근절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노동 관련 법안을 처리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3월부터 기존에 발의된 법안들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2018년 9월 여러 법안의 공통점을 묶어 '환경노동위원회 대안'을 여야 합의로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법안은 법사위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이른바 '법안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법사위 법안심사2소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법안2소위에서 한번 더 심사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의원은, 노동부 고위공무원 출신 이완영 전 의원이었다. (이 전 의원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대법원 유죄 판결로 2019년 6월 13일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완영 위원 (2018년 9월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직장 내 괴롭힘’ 해 놓고…… 정의가 불명확하다, 지금 우리 위원님들이 다들 공감하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괴롭힘이냐? 정서적인 것이냐? 신체적인 것이냐, 정신적인 것이냐? 이거 매우 주관적인 얘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면 다 괴롭힘이에요. 성희롱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불쾌했다면 성희롱으로 인정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게 최초로 이 법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명확하게, 사업장 내에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바른 정의 규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좀 더 논의를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이걸 안 하겠다는 취지가 아니고라."
법안의 체계와 자구를 심사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3달 동안 논의를 거쳐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를 조금 더 엄밀하게 수정하게 된다.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고통"에서 '정서적'을 삭제하고, "업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바꾼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 내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법 제76조의 2)로 최종 정의됐다. 그리고 여야 합의로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된다.
처음엔 '방패'로.. 나중엔 문화를 바꿀 '괴롭힘 방지법'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6개월의 유예 기간을 거쳐 오는 7월 16일 시행된다. 앞서 보았듯이 당장 '갑질 상사'가 처벌되는 일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법은 '갑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피해자들에게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많은 법조인들은 이 법의 시행 초기 모습을 과거 '직장 내 성폭력'이 사회 이슈로 대두되던 시절에 빗대 그린다. (이하 'KEF e매거진' 2018년 10월호 참조) 지난해 9월 경총 노동경제연구원 법제연구실 이슈스터디 발제에 따르면, 과거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은 지금과 달리 피해자가 회사에서 해고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 초기 소송은 피해자가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는 형태로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해고하고, 그 가해자가 회사를 상대로 소송하는 구조로 양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용기 있는 피해자들이 거듭 불합리한 문화와 싸워가면서, 결국 사회 제도와 문화를 조금씩 바꿔낸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도 아마 당분간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형태로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또라이’ 상사는 법과 상관없이 ‘갑질’을 계속할 것이다. 이런 '괴롭힘'에 저항한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불이익 처분이 있을 수 있고, '2차 괴롭힘', '3차 괴롭힘'이 뒤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항공의 박창진 사무장처럼 용기를 내 저항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우리 사회 직장 문화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길 게 틀림없다. 이번에 시행되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당장 고용노동부가 펴낸 예시 매뉴얼에서 '음주나 흡연, 회식 참여 강요', '개인사에 대한 뒷담화나 소문을 퍼뜨림', '특정 근로자가 일하거나 휴식하는 모습만을 지나치게 감시' 같은 내용이 '직장 내 괴롭힘'의 사례로 제시됐다. 그리고 이 법으로 처벌받는 사용자가 생기고, 또 관련된 법원 판례가 하나둘씩 쌓이면, 결국엔 직장 문화가 바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제도 보완이 뒤따라야 하는 건 물론이다. 제도를 바꾸는 동력은 여론에서 나오지만, 최종적인 법 개정은 입법부인 국회의 몫이다. 이미 국회에는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도 처벌하거나, 노동부에 직접 신고할 수 있게 하는 내용, 그리고 '업무 배제'와 '집단 따돌림'을 '직장 내 괴롭힘' 범주에 명시하도록 하는 법안 등 최소 3건의 보완 입법이 발의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