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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May 24. 2021

당신의 운율로 걷는 일

나의 사랑하는, 무너지는 세계





 어쩌면 '파도'는 내게서 '파도'라는 말 안에 늘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파도를 '바다'라는 말의 밑과 끝을 수도 없이 오가는 무수한 사건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날 내 앞에 툭 떨어진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우연한 시점과 사건이 그것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었다. 그러니 말이란 늘 편리하면서도 괘씸하기도 한 것이다. 단어는 파도에 관한 가능한 모든 추상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시킴으로써 파도의 모든 일에 관해 상상하기를 방해하고 있다. 


 경험은 말을 해체시킨다. 경험과 말이 서로 부딪히며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그것에 관한 설명이 되는 동안, 감각과 기억은 다시금 대상을 풍성하게 존재하게끔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다에 관한 사고와 말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자, 인식하고자 하는 세계의 생태계를 다양하게 만드는 일이다. 풍성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은 오늘도 나를 바다에 들게 한다.


 파도는 달, 그리고 바람과 함께 오가며 서로의 운율을 따른다. 해변에 가닿으면 물아래 뭍과도 어울려야만 한다. 달과 바람과 땅과 물의 만남이 파도가 되고, 이는 바다가 부르는 시와 노래가 된다. 잔잔하기도, 성난 듯 때때로 땅을 쾅쾅 치기도 하고, 밀려오는 마음보다 쓸려가는 마음이 더 커서 아슬하기도 한, 그런 시와 노래들. 이 모든 것은 우연이기보다 필연이다. 내가 그쪽으로 걷는 동안 당신이 이쪽으로 걸어와 우리가 이곳에서 만났듯, 환히 부서지는 일. 부서지며 하나로 스며드는 일.


 바다와 파도에 몸을 맡기고 몸과 정신이 오롯이 그것에 관한 운율을 따르기 시작하면 조금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매일 이 모든 노래들을 감각하며 맞춰 걷다 보면 세상의 모든 걸음들에 맞춰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작거나, 빠르거나, 느긋하거나 하더라도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2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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