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문학소녀는 아닙니다만

<안녕이라 그랬어>

by 레몬까치

나는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 책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다만, 마흔이 넘은 요즘은 새벽 다섯 시 도서관 챌린지에서 첫 문장을 읽으며 하루를 깨우고, 6시 30분이면 <뉴욕북클럽>에서 영어 문장 속 세계를 여행한다. 수요일 저녁의 <단편의 힘>, 격주의 시 낭독방, 일요일의 <일요 책방>. 이렇게 매일같이 읽고 쓰는 사람이 문학소녀는 아니라면, 그건 아마 문학이 나에게 취미가 아니라 삶의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리듬 속에서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었다. 이 책은 제목만 보면 ‘헤어짐’의 이야기 같지만, 읽고 나면 오히려 삶의 내부에서 아주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관계와 돈, 인정과 존엄 문제를 들여다보게 된다. 책 속에서 오래 머문 문장 몇 개를 정리해 본다.


“왠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어른들 선물 사는 게 제일 어려워.”
- 홈파티, 안녕이라 그랬어 | 김애란 저


표면적으로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의 삶이 실은 얼마나 많은 결핍과 불안을 덮고 있는지, 책은 작은 대화들로 드러낸다. 누군가는 이웃의 식탁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온라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정말 비싼 정보는 온라인에 없고 세상 많은 중요한 일은 식탁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라는 문장은 돈과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의 비대칭을 아주 생활 속 장면으로 보여준다.


한편, 소설 속에서 이연은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를 제각각 짐작하며 상대의 삶을 읽으려 애쓴다.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항상 ‘조금 모자라거나 조금 과한’ 인간들로 가득하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멈춰 읽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인물들은 서로를 오해하거나, 추측하거나,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거나, 또 어떤 때에는 무심하게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그 무심함과 과한 호의의 경계,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며 살아가는 피로감,

그런 것들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또 이런 문장도 있었다.

“세 사람도 가볍게 상체를 수그렸다. 두 눈에 호의와 호기심을 담고서였다. 그렇지만 그건 나이 들며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적당히 낮춘, 까다로운 듯 무심한 관심이었다. “


이 ‘까다로운 듯 무심한 관심’. 이야말로 김애란이 잘 포착하는 한국 사회의 정서다. 타인에게 너무 기대면 상처받기 쉽고, 너무 무심하면 인간관계가 맥없이 끝난다. 이 미묘한 결을 그는 이야기로, 장면으로, 대사로 꿰뚫어 잡아낸다.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돈에 대한 감정의 역사, 가난을 겪은 사람만이 아는 불안, 사회가 정해놓은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조용한 분노까지. 김애란은 ‘돈’이라는 냉정한 주제를 삶의 감정과 결합시켜 보여준다.


『안녕이라 그랬어』는 제목만 보면 떠남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실은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한 감정의 작별, 그리고 조용한 이해에 대한 서사다. 이 책은 현대인의 삶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예리하게 해부한다. 단편 소설 모두가 좋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책은 수록된 일곱 편의 글 모두가 좋았다.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내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글을 적고, 나는 다시 독서 모임 속으로 돌아간다. 문학소녀는 아니지만, 문학은 분명 내 삶의 결을 매일 조금씩 바꾼다. 오늘만큼은, 잃어버린 것들과 아직 잃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다.


안녕, 내 이웃들.

안녕, 어제의 나


안녕, 출장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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