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시작하며
"시간은 자꾸만 가는데…아무것도 결정된 일이 없다."
다이어리를 뒤적이다가 18년 3월에 쓴 문장을 읽었다.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며칠 후 였을거다. 물론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때도 느꼈으며 지금도 여전히 '고독과 불안, 절망, 상실감, 외로움, 희망, 그리움, 기대'라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늘 안고 산다. 그렇지만 별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거든. 비록 내 모습이 타인에겐 한심하고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당장에 할 수 있다 싶은 것들을 하면 또 나름의 길이 열리고 경험이 추억이 되더라.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이런 자기합리화를 위로로 생각한다.
늦게라도 카페를 갈까 하다가 영업시간을 보고 포기할 뻔 했다. 겨우 10시까지만 열다니. 가서도 고작 한두 시간 앉아있다 돌아오리라 생각되지만, 음 그래도 망설여지지 오가는 시간에 @@점 투썸은 목요일은 10:30까지, 주말엔 밤12시반까지라네. 지금이라도 갈까? 해서 8시에 안착. 10시반까지만 있다 가자. 통장 잔고는 이제 20만 원가량. 음료 값에 5천5백 원을 썼다. 벌이는 없고 소비만 지속되는 탕진의 삶도 한계가 있다. 어디 믿는 구석도 없는데.
낯선 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 문학적 기법 '낯설게 하기'처럼 '낯선 공간의 새로움'을 되새기면서 익숙한 일에 좀 더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인지. 약간의 긴장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 문장이 줄지어 나왔다. sns에서 우울과 냉소와 손가락질로 점칠된 네컷 만화를 읽은 기억이 났다. 만화는 대충 그린 듯한 그림에 짤막한 문장들이 채워져있었다. 다양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쓰린 현실을 그려내고 있었으나 이상하게 아니라고 부정하며 희망을 찾게 되는 만화였다. 때때로 발견하는 따스한 희열같은 것 말이다.
그러면서 내가 쓰는 글들도 돌이켜보았다. 내게는 배출용으로 쓰는 글들이 곧 서사의 주를 이루었다. 격앙된 감정들, 우울과 분노가 넘실대는 문장 문장들이다. 누구처럼 멋지고 건조하게 글을 쓰고 싶지마는, 당장이라도 찢어 죽고 싶을 때 나는 글을 썼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고 쉬이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을 때. 가만히 누워있던 새벽 영영 눈 뜨지 않았으면 할 때. 그렇게 당장의 내일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내가 죽으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하다가도 다 무슨 상관인지, 죽고 나면 끝인데 뭐, 라는 결론을 맞이하기도 한다. 가끔 마음과 마음이 부대끼고 사건사고가 있을 때 나는 글을 썼다.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이란 곧 내 배설물들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혹여 강제된 일이 있다면 매우 수치스럽게 느꼈다. 학부전공시간에 단편소설과같은 창작물을 제출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제출일 아침까지도 결론짓지 못하였고 어영부영 열린결말 따위로 마무리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타인의 멋진 면모를 내게도 바라면서 나의 못난 면을 내보이지 않으려 혹독하게 굴었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다르고 같고를 떠나서 그냥 해보는 것.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고 수치감을 느끼는 부분을 마비시킨 것처럼 쓰기로. 엉망이라도, 엉망이면 또 어떤지.
그간 타인의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쓰며 살아왔다. 이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진짜' 내 생각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사납게 파도치는 현실에서 조금 숨 돌릴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첫 주제로는 '탈출'이 될 것이다. 나는 계속 나를 괴롭히는 많은 일들로부터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탈출하고 싶다고. 예를 들면 나를 갉아먹는 나쁜 습관, 숨막히는 가족과 가난, 자존감을 깎아먹는 타인과의 비교,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잣대 등등에서.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