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위로가 필요한 시간
# 8
지금은 새벽. 노트북을 열고, 어제 들어온 상담 메일을 다시 읽습니다.
웹 마스터로부터 메일을 보냈다는 메시지를 받고 바로 확인한 후 메일 내용을 머리에 기억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떻게 답신을 쓸까, 궁리하며 떠오른 단어를 메모해 두고 새벽에 일어나 구체적인 답신을 작성합니다.
메일로 주고받는 사이버 상담입니다. 니체 씨 생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이제는 일상이 됐습니다. 니체 씨 당시에는 마차편으로 혹은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 기간도 며칠 혹은 몇 달이 걸렸다지요.
사연은 다양합니다. 죽고 싶다는 사람, 아프다는 사람, 돈이 없어 너무 힘들다는 사람, 성적 걱정, 부모나 친구와의 갈등 등 세상 모든 고민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사연을 읽으면서 먼저 결정하는 것은 답신의 방향입니다. 정보를 제공할 것이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것이냐, 약간의 인생 경험을 말해줄 것이냐, 이런 것을 먼저 정해야 제대로 답신을 쓰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을 잃고 중언부언, 엉뚱한 말이 되고 맙니다.
상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이 메일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함께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부모, 친구, 아내나 남편에게도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요.
상담은 문자 그대로 상담이지 치료가 아닙니다. 치료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의 영역입니다. 상담을 통해 치유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드문 케이스에 속합니다. 사실은 메일 보내는 사람들이 가운데 이미 답까지 다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됩니다. 상담에서는 충고, 조언, 판단, 평가, 이런 것은 하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사연을 보내온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걱정과 함께 더불어 나누려는 태도만 보여주어도 답신으로 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일 곤혹스러운 건, 니체 씨 같은 ‘천재’들의 사연입니다. 이제 중고등학교 다니는데 세상 이치를 다 깨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삶. 그렇게 태어나도록 만든 원초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실수며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죽어야 한다’로 결론은 내리는 사람.
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신이 구축한 이론에 꽉 잡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연을 보내는 것은 자기들의 주장을 풀어놓고 상담원이 동의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이런 의미에서, 이들도 ‘함께 나눌 사람’을 찾는 부류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니체 씨의 독특한 사상에 매료되기도 하면서 때로는 곤혹스럽습니다. 니체 씨의 말을 다 받아들여야 하나… 니체 씨의 급격한 주장을 읽노라면 수긍하기보다 갸우뚱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구나 시적인 표현이 많아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힘이 들어 더 그러합니다. 이게 무슨 뜻? 이런 갸우뚱한 시간들.
생명이 왜 귀중하다고 하는지 이해 불가입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뭔가 사회적이거나 수학적인 접근을 할 때 생명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을까요? 내 비참하고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삶에 무슨 근거와 비전을 가지고 귀중하다, 소중하다 떠드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상담원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남들에게 소중하고 일반적으로 귀하게 여겨진다 해서 그게 반드시 나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잡아두는 것은 행복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가깝죠. 죽는 것보다 죽기 전까지의 공포와 고통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갈라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인내하고 살더군요. 대단한 일이지만 늘 저게 과연 행복한 삶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도 가끔 맛있는 거 먹으니까. 그래도 간혹 웃을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살 만하다, 이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처량하고, 의미 없는 미소를 볼 때마다 저게 좋아서 웃는 건지 아니면 울었다간 망가져 버리는 사람의 방어기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린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안 그런가요?
어느 고등학생이 보내온 메일의 일부입니다. 니체 씨는 자살에도 품위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고 했지요. 죽을병에 걸려 추한 모습을 보이며 근근이 억지 연명하느니 의식이 명료할 때 과감히 선택하는 건 품위 있는 죽음, 삶이 힘들다고 회피하는 것은 저열한 죽음이라고 했습니다(당시엔 이것만 해도 파격이었죠!)
니체 씨라면 이 학생에게 어떤 답신을 썼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위로나 격려는 안 해주었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