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오페라 가수를 볼 때 17일 공연에서는 엘리자베트 역의 소프라노 레나 쿠츠너, 베누스 역의 메조 소프라노 쥘리 로바트 장드르가 A팀에서는 어느 정도 기량의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으나, 작품 전반적 완성도는 낮은 편이었다.
특히 탄호이저 역의 테너 하이코 뵈르너는 불안한 음정이 자주 드러났고, 에센바흐 역의 바리톤 톰 에릭 리는 성량이 충분히 확산되지 않았으며, 표현 방식에서 긴장된 심리 상태가 드러나 아쉬움을 남겼다.
20일 공연에서는 베누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양송미가 A팀에 비해 더 두터운 음색을 선보였으나, 이 음색으로 인해 대사 전달력이 다소 떨어졌다. 또한 1막 중 침대에 일어서서 탄호이저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에서는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았는지 순간적으로 성량 문제가 발생했다.
탄호이저 역의 테너 다니엘 프랑크는 여러모로 준수한 기량을 펼쳤다. 이 가운데 2막 중 죄를 뉘우치는 장면에서 고음으로 전개되는 부분에서 공간을 울리는 힘은 다소 부족한 편이었으나, 음이탈 없이 진행된데다 고음을 쥐어짜내는 표현 덕분에 오히려 짠한 감정이 잘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1막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지, 노래하는 부분에서 지휘자(추정)가 육성으로 두어 차례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있었고, 목동 장면에서는 성대가 풀렸는지 성량이 일시적으로 저하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3막까지 체력 안배를 잘 했던 편이라 피날레에서는 노래와 연기의 에너지가 점진적으로 발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에센바흐 역의 바리톤 김태현 역시 A팀에 비해 여러모로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 역시 체력 안배를 균형감 있게 소화한 편이었는데, 이로 인해 3막 중 ‘저녁별의 노래’를 감정적으로 잘 살려내 아주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필립 오갱의 지휘로 이뤄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는 17일 공연에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간의 템포 조율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고, 오케스트라가 상황에 따라 템포를 빠르게 치고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발생했다. 이런 관점에서 인물 간의 심리 상태와 극의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며 연주를 해야하는 관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반면 20일 공연은 관악기가 불안한 음정으로 연주할 때가 더러 있었지만, 앙상블 측면에서는 고르게 정리가 된 편이었으며 특히 무대와 긴밀하게 호흡하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요나 김은 만하임 프로덕션에서 선보인 링 사이클 연출과 유사하게 라이브 카메라로 실시간 촬영한 영상을 무대 상단 스크린에 송출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오페라 가수가 객석을 기준으로 측면을 보고 있거나 등지고 있는 경우, 스테이지 밖에서도 연기를 펼쳐야 하는 상황에서 오페라 가수들의 표정을 관찰할 수 있어 감정의 흐름을 읽어낼 때 유용한 편이었다.
다만 20일 공연에서는 2막 초반에 신호 간섭 문제로 스크린 상단에 노이즈가 발생했다. 그래서 합창단이 등장할 때 객석을 향해 라이브 카메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등 연출의 일부가 삭제됐다. 그래도 엘리자베트가 영주, 음유시인들에게서 탄호이저를 보호하는 장면부터는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베누스와 엘리자베트 사이에 탄호이저를 중앙에 배치하는 구도의 주요 연출은 스크린에 표현할 수 있었다.
한편 라이브 카메라의 활용은 시선이 분산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가령 1막에서는 무대 중앙을 계속 조명하다 무대 좌우에 커튼을 걷고 치면서 상황에 따라 여러 연출이 이뤄졌다. 무대 연출만 해도 4분할인데, 자막까지 포함하면 한 곳에 시선을 두기가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이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데 과잉친절을 베푼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작품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탄호이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요나 김은 자신만의 색을 담은 연출을 이뤄냈다. 엘리자베트와 베누스를 무대 위에 동시에 출연시키는가 하면, 몇 가지 행동을 취할 때 같은 자세를 취하는 등 동일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몇몇 오브제는 상징성이 두드러졌다. 가령 신부의 면사포를 월계관처럼 활용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이 떠올랐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선악과를 통해 성에 눈뜬 인류에게 원죄가 있으며, 예수의 고난으로 구원을 받는 부분이 있지 않나. 3막에서 엘리자베트와 베누스가 면사포를 함께 두르는 모습을 면류관과 연계한다면 이 두 여성이 끝내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막에서는 베누스를 상징하는 보조 연기자가 촛불을 한 아름 싣고 임신을 한 상태로 무대를 횡단하는가 하면, 이 연기자는 막의 끝자락에 무대 뒤쪽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말에 다다를 무렵, 탄호이저의 죽음에 절규하는 실제 베누스와는 달리 보조 출연자는 성모 마리아 뒤편에서 매우 평온한 상태로 그려진다.
이 또한 감상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겠는데, 나는 종교적 관점을 조금 더하여 앞선 면사포 장면과 함께 성모마리아와 예수라는 관계성에 의거하여 이를 베누스의 구원이라고 보았다. 탄호이저가 죽으면서 육체적 사랑을 갈구하던 베누스는 죽었고, 새 생명의 탄생과 함께 정신적 사랑에 집중하게 될 베누스라는 열린 결말로 해석했다.
한편 연출에서는 남성이 육체적 사랑을 더욱 갈구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1막의 경우 좌우 커튼을 걷어낸 한 장면에서 오른쪽 엘리베이터에서는 메이드 복장을 한 여성의 몸을 탐닉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왼쪽 엘리베이터에서는 소극적이긴 해도 엘리자베트를 갈구하는 에센바흐의 모습을 함께 그려내고 있었다. 또한 3막에서는 헤르만이 술에 취해 실크 원피스를 입은 물의 요정을 탐닉하고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막이 내린 커튼에서는 계속해서 바그너의 모습을 비추어내고 있다. 아마도 요나 김은 극 중 탄호이저를 비롯한 모든 남성을 바그너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탄호이저는 좀처럼 쉽게 올려지지 않는 바그너 작품을 보여줌과 동시에 육체적·정신적 사랑을 구원과 연결 지어 사랑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