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치강(Qigang Chen)은 중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한 현대 작곡가로, 동서양 음악의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베이징 중앙음악원을 졸업한 후, 1984년 프랑스로 유학하여 올리비에 메시앙 밑에서 4년간 공부했다. 메시앙은 천치강에 대해 “그의 작품은 중국적 사고와 유럽 음악 개념의 완전한 융합을 보여준다”고 극찬하며 그의 음악적 재능과 창의성을 높이 평가했다.
천치강의 <오행>은 오행설의 수 → 목 → 화 → 토 → 금의 순서로 순환하여 각 원소가 다음 원소를 낳는 상생의 원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치강은 이러한 개념을 따라 다섯 악장을 배열하면서, 각 악장의 음악적 재료가 다음 악장의 탄생으로 이어지도록 치밀하게 구상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물의 음악이 나무를 키우고, 나무의 음악이 불을 일으키며, 이어 흙을 거쳐 금속을 만들어내는 순환 구조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음악은 각 원소의 물리적 속성 자체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에너지와 움직임을 포착하여 함축적으로 그려낸다. 다섯 악장은 각각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자연스러운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전체 작품이 하나의 유기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오행>은 3관 편성에 여러 타악기를 활용하여 다양한 색채감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나무 윈드차임, 우드블록, 템플 블록 외에도 징, 트라이앵글, 글로켄슈필까지 온갖 재질의 소리를 동원하여 각 원소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효과음을 만들어낸다. 짧은 길이의 다섯 개 악장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가텔처럼 각기 다른 개성과 색채를 뿜어내며, 선율보다는 음색과 리듬의 변화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전반적으로 전통적 조성 어법을 바탕에 두면서도 불협화음을 섞어 화음을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에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색채 중심의 음향에서는 작곡자가 메시앙에게서 배운 기법과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색채감과 대비감은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각 원소의 이미지를 귀로 그려볼 수 있게 한다.
I. 수(水)
‘수(水)’는 잔물결처럼 섬세한 울림으로 시작된다. 도입부에서 하프의 글리산도와 맑은 타악기 음향이 어우러지며, 물결 위 햇살이 반짝이는 듯한 장면을 그려낸다. 이어지는 목관과 현악기의 잔잔한 음형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며, 음악은 고요하지만 투명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평온하면서도 내면에 강인함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작곡가는 물을 다섯 원소 가운데 가장 강한 요소로 여기면서 그 힘을 고요함 속에 담아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잔잔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향은 넓은 호수의 적막함과 바다에 잠재된 힘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II. 목 (木)
‘목(木)’에서는 음악의 색채가 생동감 있게 전환된다. 리듬과 음색의 변화가 특히 풍부하게 전개되는데, 마치 씨앗에서 싹을 틔운 나무가 빠르게 자라고 가지를 뻗어내는 모습을 연상시키듯 음악이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현악기들은 활의 나무 부분으로 현을 두드리는 콜 레뇨 주법 등을 활용하여 딱딱하고 건조한 질감을 내고, 템플 블록이나 우드블록 같은 목재 타악기의 둔탁한 두드림이 더해져 생기 있는 리듬을 형성한다. 숲속에서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연상시키고, 빠르게 뛰노는 음형들은 숲의 활력을 음향으로 표현한다. 음악의 흐름은 전반적으로 경쾌하고 활발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속에서 나무 특유의 탄력적 생명력이 느껴져 청중에게 발랄하고 활력있는 인상을 남긴다.
III. 화 (火)
‘화(火)’는 금관악기의 울림으로 시작되며, 불의 에너지를 음악 속에 불어넣는다. 호른과 트럼펫 등의 금관 앙상블이 위로 상승하는 선율 모티브를 장중하게 제시하는데, 이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순간이다. 이 선율은 밝고도 엄숙한 성격을 띠어 불이 지닌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힘을 그려내고 있으며, 전체 악장 중 불길의 온기와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작곡가는 불의 이미지를 ‘공격적이지 않은 따뜻함’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과도하게 폭발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솟구치는 이 악장의 음악은 온기를 머금고 있는 듯 하다. 금관의 선율을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풍부하게 받쳐주면서 화사한 화성을 이루고, 리듬 또한 불꽃의 춤을 추는 듯 고조되어 간다. 곡이 후반으로 갈수록 소리의 결이 겹겹이 쌓이며 불길이 휘날리고, 그 에너지는 다음 악장으로 넘어갈 다리를 놓으며 서서히 가라앉는다.
IV. 토 (土)
‘토(土))’에 이르면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가라앉으며, 묵직한 대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악장은 대지의 무게와 너그러움을 표현하듯 느리고 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데, 저음의 현악기와 금관악기가 두터운 화음으로 대지의 깊은 울림을 들려준다. 그런 가운데 간헐적으로 중국 전통 선율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가락이 들려오는데, 5음계 풍의 멜로디 조각들은 마치 땅속에 묻혀 있던 오래된 기억이나 민족의 숨결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천치강은 토를 ‘생성의 원리이자 만물의 모태’로 여긴다고 밝혔는데, 음악에서도 이러한 포근하고 포용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저음 위에 펼쳐지는 선율들은 선율들은 대지의 품처럼 따뜻하고도 엄숙한 정서를 자아내며,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듯한 명상적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된다.
V. 금 (金)
‘금 (金)’은 작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부분으로서, 가장 활기차고 역동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시작부터 경쾌한 3박자 리듬이 등장하여 강렬한 당김음으로 연주가 이뤄지는데, 탱고 풍의 리듬감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춤곡 분위기를 형성한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속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열정적인 춤으로 형상화된 듯, 음악은 곧 빠른 템포로 치닫으며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타악기 그룹이 총동원되어 박진감을 높이는 가운데, 트라이앵글과 심벌즈, 글로켄슈필 등의 금속 타악기가 반짝거리는 음향 효과를 수놓아 눈부신 금속성 광채를 소리로 표현한다. 여기에 금관과 현악기의 역동적으로 반복되는 선율은 마치 화려한 행진곡이나 열정의 축제를 연상시킨다. 후반부로 갈수록 리듬은 더욱 복잡하고 빠르게 몰아치며, 스트라빈스키를 떠올리게 하는 원시적이고 격렬한 춤의 한바탕이 전개되어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빚어낸다.
https://youtu.be/aGyaemEWYFI?feature=shared
다섯 개의 악장으로 펼쳐지는 <오행>은 물에서 시작해 금속으로 끝나는 순환구조로 동양 철학의 세계관을 서양 음악 기반의 오케스트라로 풀어낸 독특한 음악적 체험을 선사한다. 현대에 작곡된 곡이지만 난해하지 않은 음향 어법과 선명한 이미지 덕분에 클래식 입문자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다. 각 악장의 대비되는 분위기와 풍부한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물, 나무, 불, 흙, 금속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작곡가 천치강은 각 악장의 음색이 어떻게 오행의 이미지와 연결되는지, 그리고 악장과 악장 사이의 흐름에 주목해 주기를 당부했다. 공연 전에 이런 해설을 참고하면 음악이 담고 있는 구조와 상징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낼 다채로운 면모를 한층 깊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은 오는 2025.05.15.-16. 2025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의 정기 연주회 '2025 서울시향 드뷔시와 라벨'을 통해 만나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번에는 객원지휘로 휴 울프가 포디엄에서서 서울시향을 이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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